올해에는 어떤 작업을 했을까?
이제 이틀만 지나면 올해 2025년도 끝난다! 2026년이라는 생소한 숫자에 다시 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고,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난다는 게 아쉽다.
연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올초부터 계획했던 것들을 잘 끝냈는지 연말정산을 하게 된다. 그렇게 뒤돌아 살펴보니… 다행히 계약서로 맺어진 여러 일들은 무리 없이 잘 끝내왔다는 것에 안도감이 든다. 올해 끝내야 할 책이 5권이었다(커버까지 하면 6권!). 지금까지 그림책을 이렇게 많이 그려본 적이 없던 터라, 과연 잘 마음에 들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웬걸, 큰일이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으레 짧은 여행을 가곤 했는데, 이번엔 여행을 무려 네 번이나 갔다. 속초, 부산, 제주도에 마카오… 중간중간 보드책 작업이 끝날 때에는 국내로 자주 가고, 올해의 모든 작업을 10월 말 경에 거의 마무리하고 친구를 만나러 마카오로 갔다. 오히려 바빴기 때문에 보상심리로 더 자주 놀러 갔다고 할까? 내게는 ‘쉼’이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지겹고 힘들어지기 전에 완전히 잊어버리는, ‘잊을 권리’를 찾는 여정이다. 그렇기에 중간의 짧고 긴 여행들이 내겐 뜻깊었다.
그럼 지금까지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살펴볼까?
첫 번째로, 재작년에 작업한 영국 Florisbooks 출판사의 The Bumblebee Garden (호박벌 정원)의 폴란드 판 책 커버를 새로 맡았다. 따로 에이전시를 끼지 않고 한 작업인데, 예전 Florisbooks 아트 디렉터인 Richard가 폴란드 출판사의 아트 디렉터를 내게 소개해 줬다. 작업 진행과정은 예전과 똑같았다. 이런저런 샘플 러프를 그리고, 거기서 원하는 스타일로 뽑아서 스케치를 하고, 색칠해서 완성하는… 다만 계약서가 특이하게 폴란드어와 영어로 같이 병기가 되어 있어서 꽤 흥미로웠다.
이렇게 이미 출판된 그림책의 표지를 번역 출판되는 해당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바꾸는 일이 종종 있다. 번역되는 나라의 문화가 다르라던지, 아님 그냥 출판사의 심미안이 본래의 그림책 커버와 좀 다르다던지 등등… 물론 새 커버를 위한 외주비를 따로 받는다. 많은 돈을 받는 작업은 아니지만, 같은 작품이 전혀 다른 커버를 달고 폴란드 언어로 출판이 되는 걸 보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부디 머나먼 폴란드 아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두 번째로 작업한 책은 작년부터 진행해 온 Outside Our Window 시리즈의 보드북이다. 총 10권이 2027년까지 출간되는 긴 프로젝트인데, 올해 모두 3권의 책을 작업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책을 낼 수 있는 이유는, 보드북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막 시각능력이 발달하는 작은 아이들이 보는 책들은 불필요한 디테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아트 디렉터의 요구에 맞춰서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작업하려고 애를 썼다. 판형이 크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은 일반 그림책에 비해서 작업에 임하는 마음이 좀 더 가벼웠다. 작년부터 같이 일했던 아트 디렉터가 올해 퇴사를 하고, 새로운 아트 디렉터와 작업하게 되었는데 부디 내년에도 평탄하게 진행되면 좋겠다!
올해 작업한 세 책은 각각 ‘Squirrels Scamper (역: 다람쥐가 뛰어다녀요)’, ‘Wind Whirls (바람이 불어요)’, ‘Flowers Bloom (꽃이 피어나요)’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순차적으로 출시되었다. Flowers Bloom 은 올해 봄에 출간될 예정이다.
세 번째는 “Lucky and Norman (럭키와 노르만)”이라는 책이며, Penguin Books의 자회사인 Rucky Pond 출판사와 합을 맞춘 책이다. 십여 년 전 “콰이어트 Quiet "라는 책으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수잔 케인 Susan Cain과 그녀의 가족들이 글 작가이다. 변호사로 활동을 하다가 글작가로 데뷔를 한 수잔 케인은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쓴 자기 계발서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이 그림책을 통해 그림책 작가로서 데뷔하게 되었다. 한때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의 저자분과 함께 작업을 하게 되어서 영광스러운 기회였다! 다시 한번 에이전트 Aliza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이미 올봄에 모든 작업을 끝내고, 내년 초여름에 발간될 예정이다. 이번에 Color proof (샘플 프린트) 컬러 검수를 두 번이나 했는데, 모쪼록 마음에 드는 형태로 잘 인쇄가 되기를 바란다.
네 번째는 내가 가장 애를 먹었던 “The Snowmansion (눈사람 맨션)”이라는 그림책이다. 이 책은 계약서를 2년 전에 써서 작년에 끝낼 예정이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일정에 차질이 빚어져서 올여름에 겨우 끝냈다. 올해 여름은 정말… 다신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하게 더웠다! 그 더운 여름에 눈 내리는 한겨울의 풍경을 그리는 것도 꽤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 작품은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작업이었다. 스토리보드와 스케치만 수정이 용이한 아이패드로 하고, 스케치 검수가 다 끝나면 이걸 큰 사이즈 종이에 출력해야 한다. 이 종이를 새로 산 A3사이즈 크기의 라이트박스 위에 얹고, 그 위에 재단한 수채화 용지를 올려서 고정시킨다. 그리고 다시 스케치를 손으로 모두 딴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 위에 채색을 한다. 물론, 다 수작업이라서 망하면 다시 스케치부터 시작해서 다시 작업해야 한다. 스릴 넘치는 작업이다.
채색작업이 끝나면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채색을 마친 작업물들을 모두 모아 충무로에 가서 드럼스캔을 맡겨야 한다. 손바닥만 한 조각그림이라면 모를까, 이런 큰 그림들을 일일이 집에서 스캔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뿐더러 무엇보다 품질이 너무 안 좋다. Wordless, 즉 이 그림책은 “글이 없는 그림책”인 만큼, 전문적인 스캐닝 사무소에 맡겨서 그림을 디지털로 변환해야 한다. 보통 이런 드림스캐닝은 출판사에서 작가 대신 해준다. 만약 내가 미국이나 영국에 있다면, 원화를 출판사에 택배로 보내주면 출판사들이 알아서 오래 거래해 오던 스캐닝 업체에 대신 맡겨준다. 하지만 난 한국에 있고, 미국은 너무나 먼 존재…… 그냥 내가 알아서 잘 변환해서 편집해야 한다.
이미 난 수작업으로 일찍이 작업해 왔다. 데뷔 그림책인 Spin a Scarf of Sunshine (나리가 짠 햇빛 목도리) 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도 똑같은 작업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처음 해보는 그림책인 데다 수작업이라 정말 많이 헤매었고 괴로웠지만,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낸 그림책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손으로 그린 자연스러운 손맛 때문이다.
이 “The Snowmansion”을 작업하면서 역시 6년 전 데뷔책을 냈을 때처럼 똑같이 다시 헤맸다. 하지만 이번엔 좀 더 다른 방향으로 어려웠다! 글이 없는 그림책이기에, 모든 것들을 내 “그림”으로 모두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글 작가의 글이 실려 있으면 작품에 대한 내 무게감이 좀 더 줄어드는데, 이 책에선 글 작가의 글이 없고 나의 그림이 메인이 된다. 자연스럽게 더 책임감이 무겁게 되고 중압감이 든다.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너무 이상하지 않아?’
‘다른 작가들은 나보다 더 잘 그리던데… 난 왜 저렇게 못 그리는 걸까?’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내 그림을 싫어하면 어쩌지?’
늘 내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던 내가, 그림책을 만들면서 이렇게 까지 자신감을 잃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에이, 그냥 돈 받은 만큼 그리면 되지…싶다가도 그림이 메인이 되는 그림책이니 만큼 또 열심히 잘 그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근데 마음처럼 잘 그려지지 않고… 정말이지, 더운 날씨까지 더해져 끝없는 걱정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어찌어찌 잘 끝낸 후 최근까지도, 이 책에 대해서 만큼은 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몇 주 전 구독해서 자주 보는 ‘남인숙 작가의 어른성장학교’의 최근 영상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너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 서러움으로 열심히 자수성가를 한 사연자가 있다. 이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이쯤 하면 행복할 것 같은데도 불쑥불쑥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 행복한 시기에, 다른 사람들을 보면 자꾸만 화가 난다. 나는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헤쳐나가야 했는데……
어디에서나 나보다 더 나은 출발점에서 출발한 사람들,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친구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부아가 치미는 이 마음, 이 못난 마음에 스스로 실망해 버리는 이 괴로움…… 이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SOS를 친 것이다. 난 이렇게 원래 못돼 쳐 먹은 사람이었던 걸까?
https://youtu.be/4bunspS-p98?si=hJiRO-_xrAUM1bi3
이 사연에 나라면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이 사람에 비하면, 사실 나도 어렵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정서적인 지지를 받으며 잘 성장해 온 터라, 감히 내가 무어라 조언을 할 수도 없다. 남인숙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왜 아직도 행복하지 못하지?라는 감정은 실제로 성공한 분들이 흔히 겪는 일이에요. 성공하면 행복이 바로 따라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건 별개예요. 지금까지 성공하기 위해서 눌러 참았던 어려웠던 시절의 서러움과 감정, 우울감…… 이 모든 “감정 청구서”를 지금에야 늦게 받은 거예요. 사연자분은 성공을 위한 성취 쾌감을 많이 경험해서, 이렇게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금의 일상에서 느끼는 자극에서 행복감을 못 느끼는 거죠.”
“한창 일속에 전력질주 할 때는 그런 감정을 못 느끼죠. 생존 모드가 켜지면, 뇌는 감정부터 차단하거든요! 그러다가 안정되면 그때 못 느꼈던 감정을 일시불로 받게 되죠.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의 뇌 입장에서 그 부정적인 감정도 중요한 정보라서 그래요. 그래서 그 기억을 떠올리면 감정 기억이 같이 딸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처리하지 못했던 부정적 감정기억이, 다른 사람에 대한 애먼 분노로 표현되는 거랍니다. 사연자님은 성공했지만, 어릴 적 잃어버렸던 기억과 감정은 아직 돌려받지 못했어요. 성공하고 다 얻은 것 같지만, 사실 진짜 중요한 걸 얻지 못했어요.”
작가의 따뜻하고 정확한 해석에 나는 늘 놀란다.
그럼 솔루션은 뭘까?
“존재 기반 자존감을 키워나가는 연습을 시작하세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건 맞지만, 저절로 행복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사연자분이 갖고 있는 건 “성취 기반 자존감’ 이에요. 이건 정말 불안정해요. 시도에 대한 성취만으로만 자존감이 유지되기 때문이에요. ‘존재 기반 자존감’은, 그냥 나 자체로 괜찮다고 느끼는 마음이에요. 뭘 하지 않아도, 그냥 퍼져 쉬어도, ‘응 괜찮아, 잘하고 있어-’ 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인 거죠. 가치를 성취가 아닌 ‘나란 존재 자체’로 두게 되면, 외부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흔들리지 않아요.”
“자기 자신을 마치 유체이탈해서 관찰하듯, 그렇게 바라보세요. 눈감고, 나랑 비슷하게 생긴 아바타가 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이름을 붙여보고, 분류를 해보세요. 그리고 소소한 실패를 해도, 그걸로 내 가치가 손상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해요. 호기심에 맛집 갔다가 맛없어서 실패하는 그런 소소한 경험 말이죠. 그렇게 자기 자신과 조금씩 친해지는 거죠! 그렇게 자신과 친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과 마음으로 교류할 수 있어요.”
“이건 비단,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니까 꼭 기억해 두세요!”
영상을 보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일만 들여다보고 생각했지, 그동안 나라고 하는 사람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했었나? 그냥, 일을 하든 말든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로도 소중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 그저 일 많이 하는 나, 모든 클라이언트들이 원하는 나, 그들을 기쁘게 하는 나, 그런 나 자신만 생각하지 않았나?.... 이런 마음에 생각이 참 깊어졌다.
그 불타는 7월의 여름,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는 건물 탑층에서 땀을 흘리며 작업하던 나, 중간중간에 그림들을 스캔하러 충무로를 헤매는 나, 스캐닝 사무소 아저씨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나, 그렇게 작업실 와서 산더미 같은 작업량에 마음 먹먹한 나… 그렇게 일만 생각한 나에게, 나란 존재 자체에 대한 만족감, “존재 기반 자존감”이란 게 생겨날 리가 없다. 참 오랫동안, 나를 잃어버렸구나 싶었다.
그런 나라는 아바타를 생각하니, 이제야 “그때 참 힘들고 어려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의 과정들을 스스로 부정하면, 그렇게 나를 부정하면 안 되지 않은가? 워낙 혼자 일하는 터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일이 없어, 더 나를 스스로 몰아붙이곤 했는데 그러면 정말 안 되겠다 싶다.
내년에는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일 그 자체보다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아끼고 이해해 주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좀 더 나에게, 부모의 마음으로 더 관대해 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