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무사히 통과하기로 한다
가볍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발이 액셀 브레이크를 넘나 든다. 시선은 정면을 향해있다가 양쪽 사이드미러를 본다. 다시 멈춘다. 멈춘다는 건 무섭다. 다시 움직이기 힘들다. 감정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걷지 않으면 다리에 근육이 빠진다. 처음엔 아무것도 안 하고 눕고 먹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이게 정말 쉼이고 힐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쉼은 내게 두려움과 게으름으로 다가왔다. 경력단절, 암 환자, 한 살씩 늘어가는 나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똬리 틀 듯 자리 잡았다.
시작을 하는 데 꽤 오래 걸렸다. 시작해야지 하고 핑계만 늘어놓은 채 매일 일과들을 뒤로 미뤘다. 하루쯤은 쉬어도 되지라고 자기변명만 하기 급급했다. 공책에 방대한 계획들을 써 놓고 나니 스스로 민망했다. 누가 봐도 몇 년은 걸릴 희망적이고 성공적인 계획들이다. 큰 계획을 세우면 하지 못했을 때 상실감이 크다. 목표를 정하면 꾸준히 해야 되는데 항상 이상만 높다. 나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소소하게 도전하기로 했다. 그리고 계획이 아닌 ‘시작’에 집중하기로.
십 년 만에 운전 연수를 받고 있다. 정확히는 도로주행연습을 한다. 도로 위의 차들은 꼭 내 삶의 순간 같다. 앞을 가로막는 차선, 갑자기 끼어드는 트럭처럼 예상치 못한 감정들이 들이닥친다.
신호등이 갑자기 빨간 불로 바뀐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핸들을 손에 잡으면 온몸에 긴장감이 맴돈다.
처음에는 도로에 나가는 거 자체가 두려워 택배회사 근처 공터만 돌았다. 미러를 보는 법도 길을 보고 깜빡이를 넣는 것도 몰라 헤맸다. 그래도 명세기 십 년 차 되는 장롱면허인데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나.
고속도로, 구부러진 커브길, 국도 지금은 조금씩 범위를 확장시켜 주행 연습을 하고 있다. 할 수 있나라고 묻기보단 일단 시작한다. 시작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된다. 마음도 주행과 같지 않은가.
운전은 결국 나 아닌 모든 것들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일이다. 어떠한 변수에 흔들려도 중심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에프엠 공식처럼 배워도 환경과 외부요인에 따라 언제든 바뀐다. 또 길을 잘못 들었다 해도 끝은 아니다. 다시 돌아가면 되니까. 기름값 더 내고 공부 더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느지막한 나이에 운전을 한다. 누군가에게는 쉽고 가벼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겐 큰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긴장이 파도처럼 밀려와 손바닥 가득 땀이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한 감각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줬다. 운전석에 앉아 브레이크를 밟을 때 보다 액셀을 밟고 나아갈 때 내 삶도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꼈으니까.
완벽한 주행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안전하게 주위를 살피고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다시 나를 움직이기로 한 ‘마음’이다. 결심이 곧 마음을 회복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어쩌면 회복이란, 내 마음의 핸들을 다시 잡는 용기 아닐까.
삶이라는 도로 위에 예고 없는 굴곡이 펼쳐진다. 오늘도 나는 브레이크와 액셀 사이 나만의 속도로 감정의 파도를 건넌다. 오늘 주행은 꽤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