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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기지개를 켰다

매일 아침 따뜻한 눈이 날 반긴다

by 최물결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서 내려온 날부터 시간이 정지됐다. 빠르게 가던 하루가 슬로모션이다.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고 모든 이유에 병을 갔다 붙였다. 나는 암 환자니까 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마음은 주변까지 전염되고 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나를 기다리는 일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암에 걸려 쓸모 없어졌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표준치료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적응이 되지 않았다. 꽤 오래 방황했다. 하루 종일 누워있기도 했고, 영화나 드라마를 연달아봤다. 한마디로 시간을 때운 격이다.


그러다 다시 먼저 간 반려견 딸기 생각이 났다. 왜 그렇게 아프게 갔을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녀석의 눈이 생각났다. 보고 싶었다.


치료가 끝나고 사 개월 차, 딸기가 떠난 지 딱 일 년이 되는 무렵 유기견을 데려왔다. 정확히는 파양견.

단순히 키우던 강아지가 그리워서, 외로워서 덜컥 데려온 건 아니었다. 나도 한 생명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아프지 않기로 했다. 데려온 녀석은 나처럼 겁도 많고 다른 강아지와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일단 데려왔는데 목청이 엄청 크다. 시도 때도 없이 짖는다. 왜 파양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뭐가 불편한가 바뀐 환경에 낯설진 않은가 지켜본다. 사실 이름도 지어놨다. 자두.



k.jpg 함께한지 10개월이나 됐다


매일 아침 일찍 눈을 뜨게 됐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작은 눈동자가 있었다. 밥을 챙기기 위해 오줌 패드를 갈기 위해 분주해졌다. 하루의 루틴 중 절대 빼먹지 않는 건 산책이다. 자두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녀석과 살려면 동물병원이나 애견카페도 가야 하니까 운전 연수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작은 행동들이 녀석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니 행복했다.


주말에 한 번씩은 더 큰 운동장이나 공원을 간다. 빨리 걷는 녀석과 느리게 걷는 나. 걷다 보니 발을 맞추고 있었다. 햇볕, 바람, 흙냄새, 작은 웃음. 하루하루가 다시 살아지는 느낌이었다. 존재 자체로도 다시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 이 작은 존재가 주는 기쁨은 컸다. 말 대신 숨결로 위로를 건네는 자두는 내 마음 가장 깊숙이 다녀간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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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가 지킬 게 있으면 두렵다 말했다. 아픈 것도 힘든 것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반대로 생각하면 지킬 게 있으니 살게 되는 거 아닐까. 나를 바라보는 녀석처럼 나도 녀석을 기다린다. 누군가가 날 기다린다는 건 때로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삶을 선택하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병 때문에 불안하고 겁난다. 그럼에도 일어나서 걷고 먹고 웃는다. 이 모든 시작은 자두의 눈빛 하나에서 비롯된다.


살민 살아진다 폭삭 속았수다에서 나온 제주 사투리다. 살면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뜻.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지쳐도 지나갈 테니까.


힘든 일을 겪고도 나는 살아진다. 어쩌면 살아내는 중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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