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어느 가을밤, 너에게
2014년 가을, 졸업한 후 내게 남은 건 졸업장뿐이었다. 그 후로 이년 남짓 백수 일 때가 있었다. 무기력하게 집에만 있었던 나는 집순이, 더 나아가 폐인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매일 규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지만 의지가 없었다. 인터넷에서 매일 세수를 하고 샤워를 자주 하는 게 무기력증이 도움이 된다는 내용을 보았다. 나는 점심이 조금 지난 2시 정도가 되면 샤워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면 우리 집 강아지는 산책 갈 때마다 매는 목줄을 물고 와 내게 나가자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마치 장난감 가게에서 '엄마 나 저거 사줘'하며 손목을 끄는 아이처럼 내게 응석을 부렸다.
머릿속으로 오 분 동안 선과 악이 왔다 갔다 움직인다. 악은 무기력한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려는 나고, 선은 그래도 저렇게 불쌍한 눈빛을 보내는데 산책 한번 시켜줘야지 하는 내 모습이다.
결국 강아지가 승
무기력한 내 모습을 끌고 나온 강아지가 이겼다. 매우 귀찮아하고 나가기 싫어하는 나는 강아지의 손아귀에 이끌려 종종 아니 아주 많이 바깥으로 나왔다.
우리 집 강아지는 사색하는 걸 좋아했다. 아파트 단지를 나오면 코를 벌렁거리고 꼬리를 산들산들 흔들며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니곤 했다. 녀석 때문에 백수 생활 동안 계절이 변하는 걸 눈으로 코로 또 녀석의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강아지는 풀숲에 있는 걸 좋아했다. 양쪽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때면 책을 읽다 잠든 사람 같기도 하고, 오늘 풀 상태는 좋군 이라고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축 늘어진 나를 일으킨 건 녀석이다.
사각사각, 가을 낙엽이 떨어지고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검은 눈동자가 햇빛 속에서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다. 눈동자 속에는 주인 너 산책 더 해라,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과 상념이 호수처럼 잠겨 있는 것 같다. 강아지는 오래도록 주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아 놓기라도 하나보다. 이슬을 머금은 듯이 두 눈이 촉촉하게 빛난다.
낙엽 위를 총총총 걸어간다. 나는 강아지가 풀숲이나 나무 주변을 딛는 것이 싫었다. 흙을 밟으면 발이 더러워져서 더 꼼꼼하게 씻겨야 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실용성을 위한 내 판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강아지는 듣지 않는다. 그저 본능에 몸을 맡긴다. 나무 주변 둥치, 뿌리 가까이로 다가가 기필코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는 힘차게 뒷발로 땅을 긁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행동은 자신의 영역표시이자 냄새를 다른 이들에게 퍼트리고자 하는 행동이란다. '어쩐지 참으로 용맹하게 발차기를 한다 싶었더라니'
"반대방향으로 나를 이끈다"
딱 삼십 분만 산책할 요량으로 알람을 맞춰놨었다. 그런데 더 걷자며 자리에 앉아서 시위하듯 앉아있다. 몸이 망부석이 된 것처럼. 지금 주객전도가 돼 버림에 틀림이 없다. 분명 산책로, 이동경로를 아는 건 난데 나를 이끄는 것이 강아지님이 돼 버렸다.
"날 산책시켜줘서 고맙다."
강아지 덕에 오늘은 날씨가 쌀쌀한지 곧 비가 올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흰 뭉게구름이 파스텔을 칠해 문지른 것처럼. 아스라이 번져 보였다. 그동안 보지 못한 풍경들을 나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하루하루 변하는 게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무기력하고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바람의 세기는 달랐고 공기의 향, 질감은 변해 있었다.
"아 매일이 다르구나"
강아지는 매일 변하는 하늘의 모습을 공기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와 나누고 싶어 했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난 더러워지는 발을 씻길 생각만 했으니. 참으로 이기적인 주인이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날 산책시켜주렴"
엄마는 강아지 덕에 네가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은 저녁 산책이다. 추석 연휴인데 유난히 큰 보름달이 전구처럼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낮과 다른 기온, 밤공기에 취해 전진하다가도 팽그르르 도는 강아지, 그 길목에서 안내자가 돼준다. 강아지는 내게 하늘을 보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