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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Oct 07. 2020

당신의 첫을 찾습니다

후덥지근한 날 이사를 하며 찾은 것들



  첫이란 접미사는 부드럽다. 한번 베어 물면 바스락 거리며 입가에 단맛이 돋는 패스츄리 같다. 나는 첫이란 접미사가 좋다. 순수하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서툰데 설렌다. 첫 만남, 첫 키스, 첫 포옹, 첫 입사, 첫인상, 첫 이별, 첫 술 처음 한다는 건 낯설고도 설레니까.




  해가 쨍쨍하게 창문 위로 쏟아지는 어느 날, 봄과 여름 그 사이 초입길에 선 어느 날이었다. 

2017년, 많게는 20년 이상된 집과 작별을 고했다. 낡았던 집은 리모델링을 해서 세를 주었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할머니가 오래 동안 팔지 않아서 재개발 지역에 생긴 새 아파트였다. 짐을 싸고 옮기며 추억으로 어룽진 물건들이 꽤 많이 나왔다. 이건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 용돈 주고 산 인형인데 버려 말어? 사실 추억이 깃든 물건은 본인이 간직하고 싶을 법도 한데 난 달랐다. 버려버려를 외쳤다. 빨리 이 낡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물건도 구분 없이 빽빽하게 쌓아두고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달아 찾아 꺼내 썼었다. 예를 들면 쌓아둔 책 중에 제일 상단에 있는 건 틈틈이 꺼내 보며 글 작업을 하는 것, 의자에 걸려 있는 아우터는 이번 주 내내 걸칠 것들. 쇼핑백 안에 쌓아둔 종이는 곧 있음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 등. 나름의 규칙적인 시그널이 있었다. 엄마는 “아니 그냥 다 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해 물건 좀 보고 버려”라고 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나는 엄마에게  “엄마 미니멀하게 살아야 돼 요즘 그게 대세야 엄마는 너무 저장하려고 해”라고 말했다. 

거만하게 손을 흔들며 스웨그 있는 목소리로. 미니멀리즘이란 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곧 내가 말하고도 내가 뻘쭘해서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추억을 예쁘게 간직하는 법”

  신박하게 집을 정리해 주는 프로에서 한 아나운서가 나왔다. 평소 자기 관리와 지적인 모습으로 사랑받던 아나운서인데,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추억이란다. 추억과 이력이기 때문에 버리기 망설여진다고. 방 하나를 아예 추억의 방으로 두어 물건들을 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추억의 방이 아니라 그냥 마구 쌓아둔 모습이었다. 흡사 내 방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해가 됐다. 상위 1%에 든 수능 성적표, 직장 사원증 어찌 버릴 수가 있을까. 나도 아직 못 버리는데. 입으로만 미니멀리즘을 외쳤지만 사실은 나도 못 버리기 일인자다 정확히 말하면 안 버리는 것이다. 


“이사를 하며 ‘첫’이 담긴 물건들이 보였다”

  프로그램에서는 아나운서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물건들 중 대부분은 너덜너덜한 종이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상장, 성적표, 대본집 롤링페이퍼 등등…….

나에게도 오랜 역사들이 상자 안에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해 꽤 많은 상장을 보유한 나는 상장 부자다. 또 일기장, 편지 부자 기도 하다. 일기 쓰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편지 써 주는걸 유난히 좋아했었다. 그때는 몰랐던 어릴 때 처음을 간직한 글자들은 서툴지만 수줍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요즘 잘 지내니? 다음에 너네 집 놀러 가도 돼?라는 두서없는 문장을 마구 쏟아내기도 했다. 


“추억은 예쁘게 보관해야 한다”

  정리 프로에서는 종이 물건들은 예쁘게 코팅을 해서 클리어 파일에 보관하면 오래도록 볼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아니면 스캔을 해서 파일로 보관하는 법도 한 방법이라고. 엄마 아빠는 앞날을 내다본 것일까. 

  아빠는 어릴 때부터 초, 중, 고등학교 때까지 상장을 받아 오는 족족 문방구에 가서 코팅을 해왔다. 이래야 구겨지지도 않고 보기도 편하지 라고 말했다. 아빠는 열고 닫을 수 있는 상자 안에 유치원에서 어버이날 썼던 편지며 상장들을 다 코팅해 정리해 놨다.

“너 커서 봐봐라. 이게 다 가보야 신기할걸?”    

나는 그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쓴 편진데 버려도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어디 두꺼운 책 사이에 껴 놓았다가 찾아봐도 되지 않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왜 엄마, 아빠가 그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일기장을 넘겨보면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이런 언어로? 다소 정적이지만 진지한 말투도 많았고, 웃긴 것도 많았다. 사실 웃기다기보단 오글거렸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부들부들 입을 떨었다. 곧 박장대소한다.




“이사를 하며 나의 첫을 찾다”

  이사 오기 전 집은 일곱 살 때 엄마 아빠가 첫 장만한 집이다. 이곳에서 성인의 절반을 살았었다. 오래됐기 때문에 내 방은 문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억지로 닫아야만 했었다. 내 방에는 버릴 종이들이 꽤 많았다. 누가 보면 종이 귀신인 줄 알 거다. 

‘이번 연도 파이팅 잘 될 거다’라고 자기 암시를 쓴 노트만 몇 권인가' 나는 새해 첫 다짐을 적은 작심삼일 노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디자인은 예쁜데 몇 년 전 시간의 1월에서 멈춘 다이어리들은 꽤 많았다. 

“첫 이사 짜장면을 먹다”

그 날은 여름이라 후텁지근했다. 그래도 겨울보다 여름에 이사하는 게 낫지라고 위안을 삼았다. 우리 가족은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켰다. 이게 티브이에서만 보던 이사 후 짜장면 먹는 것이로구나. 나는 괜히 신문지를 덕지덕지 깔았다. 이사를 하고 집을 치운뒤에 먹는 짜장면은 꿀맛이었다. 

“정리라는 건 비울 건 비우고 채울 건 채우는 것” 

 이사를 하며 예쁜 쓰레기가 되지 않게 추억들을 잘 정리했다. 내 역사들은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예쁘게 코팅되어 상자 안 파일에 차곡차곡 앨범처럼 놓여있었다. 앞으로 옷 정리 방 정리가 문제였다. 커다란 이사 박스 예닐곱 개에 물건들이 새 집으로 들어왔다. 이 집에서 다시 깨끗하게 시작하는 거야. 이곳은 새로운 보금자리니까. 마음속으로 깨끗하게, 미니멀하게 살자를 계속 되뇌었다. 앞으로 펼쳐지는 일들아 잘 부탁해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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