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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Feb 03. 2020

샴푸의 요정

20년 전 목욕한 날, 20년 후 무더운 여름 할머니를 목욕시키는 날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맞벌이로 일을 나가면 외할머니는 아침 점심을 챙겨주었다. 밥은 물론이고, 학원 등하교 외에도 내가 누구와 친하며 누구와 놀았는지 어디에 갔다 왔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 바로 할머니 었다. 유치원 등굣길 하굣길 다른 엄마들 틈새로 보이는 것은 외할머니의 파마머리였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집에 들어오면 비누로 손을 씻어야 했고 마중 나는 어렸을 때 머리 감는 것을 싫어했다. 유치원을 갔다 오면 학원에 가거나 오늘은 어떤 친구와 놀까 고민하기에 바빴는데 할머니는 나를 제일 먼저 씻겼다. 그때는 왜 씻는 게 싫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어린 마음에 씻는 게 시원하고 개운하다는 표현이 뭔지 몰랐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아빠가 ‘따뜻한 물로 샤워해야 시원하지’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처럼. 일곱 살의 나는 많이 어렸다.


  지금은 하루에 한 번은 머리를 꼭 감아야 직성이 풀린다. 어른이 될수록 몸에 아무 향이 나지 않으면 텁텁하게 느껴져서 향긋한 향수를 찾게 된다. 바디로션과 스크럽으로 좀 더 피부를 산뜻하게 만들어서 몸을 릴랙스 시켜야 아 비로소 씻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유치원 때는 달랐다. 조금만 머리를 문질러도 때수건에 비누를 묻혀 몸을 박박 닦아도 소리만 질렀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주구려 앉아 나를 안은 채로 머리를 감겼다. 어린 나이 나는 안 하려는 것에 도가 텄다. 호흡기가 안 좋아서 이비인후과에 자주 갔는데 입을 벌리지 않으면 약을 안 바르겠지 하고 끝까지 입을 안 벌린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치료를 안 받으려는 요량으로 도망 다닌 적도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피부가 약했던 나는 항상 땀띠가 났다. 신나게 놀다보면 땀이 잔뜩 나서 옷깃 속이 잔뜩 젖어 있기도 했다. 할머니한테 안긴 내 머리가 화장실 바닥을 향해 가 있었다.  고집을 피우는 나를 아는 할머니는 나를 단숨에 안았다. 나는 눈에 물은 들어가게 하지 말라며 크게 소리를 쳤다. 두 눈을 꾹 감은 눈 주변으로 할머니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가끔 두피 속을 벅벅 긁어댈 때마다 아프다며 칭얼거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초록색 네모난 때수건으로 내 작은 몸을 벅벅 밀어준다. 따갑다고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투명한 욕실 사이를 훑고 지나간다. 어느새 욕조 거울 앞에 성에가 껴 있었다. 나는 찡얼대다가도 성에 낀 거울을 보며 손가락으로 거울 위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욕실 가득 핀 수증기만큼이나 할머니의 몸에도 땀이 나 있었다. 머리 감기가 끝나면 목욕탕에 거품을 풀어 주었다. 거품이 물 위로 풍성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면 나는 꺄르륵 장난기 가득한 소리를 내며 피어오른 거품을 직접 몸 여기저기에 옮기기도 하고 손위에 올려놓고 후 불기도 했다. 비누거품들이 방울방울 욕실 주변으로 떠 다녔다. 나는 요정이라도 된 것 마냥 신나 향긋한 냄새를 타고 빙그르르 돌았다.




  할머니는 어디서 할머니 손에서 컸다고 안 씻고 냄새난다는 소리 듣지 않게 나를 열심히 씻겼다. 옷 하나도 머리 매무새 하나도 항상 깔끔하게 챙겨주었다. 머리도 아침마다  예쁘게 본인 손으로 땋아주어서 나는 유치원에서 나름 패셔너블한 아이 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할머니가 목욕하는 날이다. 매일 씻겨드리지는 못해도 가끔 시간이 있을 때면 할머니의 몸에 바디로션을 발라드 린다. 아흔세가 넘은 할머니는 제 몸을 혼자 씻으려고 한다. 수증기 가득 피어난 욕실 너머로 할머니의 축 쳐진 몸이 보였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덩그러니 앉아있는 할머니의 몸을 바라본다. 혼자 주구려 앉아있는 할머니의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어준다. 주름진 할머니의 몸 마디마디를 만져보는데 웬일인지 낯설다. 나를 세게 안아 머리를 감겨주던 할머니의 모습이 없다. 하지만 이제 내가 할머니의 몸에 비누거품을 내준다. 무표정한 할머니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활짝 필수 있도록 어렸을 때 그때의 해맑은 내가 될 수 있도록. 나는 비누거품 놀이를 하게 할머니에게 흥을 돋워 준다. 20여 년 전 할머니와 내 모습이 뒤바뀌었다. 향이 사라진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사실 수 있도록 힘을 내 샴푸를 짠다. 그때의 할머니처럼 만큼 정성스럽게는 아니더라도 열심히 할머니의 흰 머릿결을 쓰다듬듯 거품을 묻혀준다. 할머니가 시원한지 다 씻고 나서 거울을 보며 함박 미소를 지으신다. 가끔씩 떠다니는 거품 방울 사이사이로 20년 전 할머니와 내 시간들이 교차하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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