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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Feb 24. 2020

운동회날 아빠가 넘어졌다

   

  사진첩을 넘기다가 유치원에 다닐 때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돗자리 위에 엄마 아빠가 앉아있고 중앙에는 내가 앉아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내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햇살 때문인지 찌푸린 이마 사이에 살짝 금이 가 있다. 분명 그날이었을 것이다. 흰색 상하의를 입은 내 모습이 그날 유치원 운동회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맞벌이 었던 엄마 아빠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은 유치원 행사가 있을 때였다. 어린 나도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내게 엄마 아빠의 쉬는 날은 나들이를 가는 것처럼 신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동안 연습했던 운동회 춤 연습에 어깨도 절로 들썩이고 있었다.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너희 엄마는 어딨냐고 물으며 서로의 가족을 보물찾기 하듯 손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탕 소리와 함께 먼발치에서 여러 명이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앉아있던 친구들이 일어나서 아빠의 달리기 시합이라며 소리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앞으로 전진하는 경주마처럼 질주하는 우리 아빠의 그림자도 보였다. 앞으로 곧장 나아가는 아빠의 모습이 다른 아빠들의 모습을 앞질렀다. 1등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그림자는 뭔가에 맞은 듯 튕겨져 나갔다. 사실 그때부터 내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빠는 일등으로 달리다가 넘어져 꼴등을 했다. 어린 나는 창피했는지 하루 종일 고개만 푹 숙이고 다녔다. 내심 아빠의 일등을 기대했는데 넘어졌다는 사실이 창피한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어린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너네 아빠 넘어져서 꼴등 했나 봐. 원래 1등이었는데”





  언젠가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였을까. 어렸을 때부터 아빠를 작게 바라보는 내 마음은 사춘기 시절을 보내면서 더 커졌다. 그 시기 즈음에 아빠는 회사 구조조정인지 부당해고인지 모르는 일로 회사를 쉬고 있었다. 아빠는 왜 쉬는 것일까. 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빠가 몰래 문갑 뒤에 숨겨두고 쓰는 일기장을 열어본 적도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아빠의 빼곡한 노트에는 노동법, 서류, 어려운 법률용어 등이 적혀있었다. 어린 나이었지만 눈치가 빨랐던 나는 몇몇의 단어들을 보며 아빠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을까를 생각하면서도 그런 아빠가 무능력해 보였다. 그래서 아빠가 밉고 또 미워졌다.

  그 후로 20여 년이 흘렀다. 젊었던 그 시절 삼십 대 중반의 아빠는 직장생활을 하다 퇴직을 하셨고, 그즈음 나는 새로운 곳에 취직했다. 그런데 내가 막상 사회에 나가보니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회사에 일 년 근무할 때마다 퇴직금, 연봉협상이란 일말의 희망으로 근근이 조금씩 버틸 수 있었지만 중간중간 내게는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다니던 직장을 일 년 반 만에 그만두고 팔 개월 동안 쉬게 됐다. 일에 치여 인간관계에 치여 온갖 이유를 만들어 대며 쉬는 시간을 갖는 동안 아빠의 모습을 되돌아봤다. 그러자  4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던 아빠가 실로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임금체불, 회사 구조조정 등 여러 가지 문제 속에 아빠는 머리가 복잡했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 일해야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아빠는 다른 곳을 알아보고 바로 일을 했다고 한단다. 사십여 년의 시간 동안 한 번도 일을 놓지 않은 아빠……. 지금 아빠보다 키와 몸집은 더 커졌지만 아빠의 모습이 커다랗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빠는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어도 바로 일어나서 사등으로 꿋꿋하게 결승선을 밟았다. 넘어지는 건 비단 창피한 것이 아니었다. 부당한 대우로 직장에서 문제가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가족을 위해 또 다른 곳을 알아보고 다시 일어났다. 어쩌면 넘어지는 창피함, 1등이 주는 첫 번째라는 의미보다 큰 것은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오랜 세월이 지나 넘어짐이 주는 깊은 의미를 깨달은 나는 다시 일어서 보려고 한다. 넘어지고 넘어져도 부끄러워하지 말자. 쪽팔려하지 말고 일어서서 달려보려고 한다. 결국에는 모두 의미 있는 모습으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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