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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Dec 17. 2021

내가 마라맛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

자극이 계속되면 무뎌진다

나는 무섭고, 공포스럽고, 또 미스터리한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추적하는 프로그램,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는 프로그램,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을 잡는 프로그램 등을 자주 틀어놓는다. 본다는 것보다 나도 모르게 본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무뎌지고 싶었나 보다. 매운 것을 먹고, 받지 않는 술에 간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자극적인 것들에 익숙해지고 싶었나 보다. 사는 건  사실 TV 속 세상보다 더욱 맵고 쓴 마라맛 세상 같다. 

  어릴 때, 한참 유행하던 범인 잡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프로그램 제목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건 25시' 

당시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오는 도둑이 집집마다 기승을 부렸는데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웠다.

그때 내 심정을 되짚고 있노라면 귀엽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밤 11시에서 12시, 나는 도둑이 집에 들어오면 안 된다며 집안 베란다 곳곳을 누볐다.

요즘에는 '차라리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로' 

그때나 지금이나 TV를 틀면 온갖 사건사고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옛날에는 피만 봐도 '엄마'하며 누군가를 찾았지만 지금은 그래 그렇구나, 저런 일도 있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덧 나는 슬픔에도 안 좋은 일에도 담담해지고 싶었나 보다. 이 모든 것들을 받아칠 여력이 없는 것일 수도. 

  재택근무를 하며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마라탕을 시켰다. 내가 좋아하는 소시지, 고기, 숙주, 나물, 버섯 등을 넣어서 건더기와 칼칼한 국을 들이켠다. 매운맛에 길들여진 탓인가 별로 맵지 않다. 그날은 더 매운맛이 당겼나 보다.


  삶이 마라탕보다 더 맵고 아픈 것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모가 보인 경악스러운 행동은 사람인지 짐승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엄마는 평소 이모를 많이 믿었다. 그래서 재정적인 부분, 특히 심부름 같을 것을 줄곧 부탁했다. 엄마의 사망 이후에도 이모는 분명히 엄마 카드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 혹은 나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하나, 엄마의 통장에서 사망 전 후, 6000만 원에서 7000만 원가량이 출금되어 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고인이 된 시점, 엄마의 통장에서 3000만 원 출금이 확인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돈을 엄마가 준 것이라고 끝까지 우기는 행동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른 것도 아닌 고인의 돈을 건드는 건 예의도 아니며, 인간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으니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엄마 명의의 보험들이 이모 이름으로 하나 둘 바뀌어 있는 걸 나중에서야 확인했다. 알고 보니 엄마의 보험금을 찾아줄 때, 아빠를 대동하고 은행을 다니며 사인을 하게 했고, 보험이 바뀌는지도 모른 채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이모만 믿었었다. 

'마지막이에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그게 엄마에 대한 예의예요.' 최대한 작고 어두침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소리는 무언가에 대한 희망도 진실도 세상 그 무엇도 믿지 않겠다는 듯 담담했다. 그냥 가져갔다고 시인해도 좋으니 변명이라도 좋으니 진실을 듣고 싶었으니까. 

이모는 엄마 밑에서 오랫동안 보험에 대해 배워 설계사를 했는데 이모, 이모부 신용등급이 안 좋아 잠시 엄마 이름을 빌려 보험료를 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보험을 다시 되찾았을 뿐이라며 뻔뻔스럽게 얘기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사람을 칼로 찔러야만 죽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집으로 오는 길 그 사람을 믿었던 아빠는 나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계속 잠을 못 잤고, 미안하다고 연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들을 다시 붙잡아서 끌어 붙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날 나는 열심히 울었다. 엉엉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가슴속으로 우는 것, 눈물도 사치 같아 꽁꽁 싸매고 우는 것. 

언젠가 아빠한테 말한 적이 있다.

아빠 진짜 슬픈 건 소리 내면서 우는 게 아니야. 너무 슬프면 울음도 안 나와. 그냥, 그렇게 혼자 조용히 우는 거야.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냉한 기운이 웃도는 차 안에서 보이지 않는 아빠와 나의 숨소리가 들렸다. 

매운 것에 길들여지는 것처럼 오늘 사건사고를 유튜브로 튼다. 그것도 제일 자극적인 것으로. 나만의 감정 컨트롤, 맵고 쓴 것, 아픈 것에 무뎌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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