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라일락 Dec 29. 2021

금쪽같은 내 엄마

엄마도 사춘기가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오랜만에 티브이를 틀었다. 요새는 하도 프로그램 재방송을 많이 하기에 빠르게 리모컨을 누른다. 얼핏 봤던 채널들 투성이다. 그중에 한 채널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바로 '금쪽이'다.

오은영 박사가 솔루션을 주는 프로그램명 '금쪽같은 내 새끼' 이전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낯설지 않고 편안한 인상이다. 아이의 마음을 잘 보듬어 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그녀의 두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찾아가서 상담받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상담료가 많이 든다지) 

내가 보는 편은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 대한 내용이었다. 평소에는 잘 웃고 엄마에게 애교도 부리고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갑자기 돌변하는 무서운 병. 사춘기.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던가 휴대폰 게임 결제를 어마어마하게 한다던가,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갑자기 즉흥적이고 난폭한 행동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무섭다.

나는 계속 티브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계속 보고 있으니 부모님의 입장이 되어 내 속이 타들어 갔다. 

사춘기 청소년은 보통 가면성 우울증이라고 해서 겉으로는 웃어 보이지만 속 내는 안 그런 경우들이 많다고 한다. 오은영 박사님은 어떻게 아이가 생활하는 모습만 보고 척척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건지, 저 프로가 내가 사춘기였을 때 있었으면 좋았을 걸 이란 생각을 해본다.

계속 보다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시청자 모드가 된다. 나는 한 때 나도 저런 모습을 보였다는 걸 알고 있다. 


  열세 살에서 열네 살 초경이 지나갈 무렵이었나. 나는 꽤 생각이 많은 편이어서 생각이 성숙했다. 무얼 하고 살아야 행복한지에 깊게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먹고 살 방법은 많은데 어린 나이에 꽤 철학적이었다지. 당시 엄마는 내게 바이올린 쪽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예술중학교에 보낼까, 유학을 보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없는 돈에 바이올린, 예중, 유학이라니 단어만 들어도 꽤 우리집이 당시 고위층인 줄 착각할 수도 있을 텐데 전혀 아니었다. 나도 어릴 때는 돈 걱정 없이 뒷바라지해주는 엄마를 보며 우리집이 꽤나 잘 살았는지 착각했으니까. 당시 엄마는 보험회사를 아빠는 철도 부품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그래도 딸 기죽을까 배우고 싶다는 거 다 가르치며 잘하고 열심히 하는 분야에 대해 밀어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셨다. 아마 엄마가 생전에 못했던 것을 다 하게 하고 싶으셨던 바람이었을까.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삐딱선을 탔었다. 문을 닫고 혼자 있으려고 하고, 평범하게 중학교에 진학해서 지내고 싶은데 유학이다, 음악이다 내 진로를 결정하려는 엄마가 미웠을 것이다. 다 나 잘되라고 그런 거였는데 말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얘기지만 엄마가 살아생전에 계셨을 때 가끔 장난처럼 이야기했다.

   '아 그때 나 그냥 유학 보내지 그럼 뭐라도 얻어올 텐데, 영어를 잘할 수도 있잖아. 지금은 할 줄 아는 게 없

    어'

  엄마는 보내준다고 했을 때 가면 되지 않았냐면서 먼 이야기 하듯 웃으며 대답했다. 

  음악이 좋았지만 음악을 어린 나이부터 한 평생 가지고 간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컸었다. 지금에야 어릴 때부터 아이돌 준비며, 조기교육이며 어릴 때 아이들의 꿈이 확고해지는데. 나는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춘기 아이의 마음은 갈대라고 음악을 포기하니 하던 것이 사라진 것 같아 한동안 또 우울했다. 지금은 부모님께 내 주장을 말하다 못해 화를 내는 편이지만 그때는 혼자 삭혔으니까. 나는 엄마에게 조용한 금쪽이었겠지. 그래도 감정 기복은 심해서 어떤 날은 괜히 애먼 투정을 부리며 짜증을 냈다. 예를 들면 치킨이 너무 먹고 싶어서 시켜달라고 했는데 안 시켜주면 그걸 명분 삼아 한참 동안 화내는 것이다. 엄마도 저 마음이었을까.

티브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엄마에게 죽는다는 말은 아니어도, 청소년 우울증이 심했을 때 모진 말들을 한 기억이 난다. 금쪽이는 솔루션이라도 받고 바뀐 모습을 기대라도 하지 나는 이제 그 모습을 보여줄 사람이 없다. 내가 자식을 낳으면 이해할 수 있으려나. 금쪽이와 그의 부모님을 보며 누군가를 이해해주고받아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엄마의 사춘기도 생각해보았다. 엄마에겐 우울증, 갱년기, 하다못해 힘들었을 때 어떻게 지나갔을까. 엄마가 언젠간 우울증도 사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일하고 바쁜데 그런 거 걸릴 시간도 없다고 했던 말이 문득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 말인즉슨 본인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도 없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때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갔던 시간들을 다시 끌어올 수 없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애먼 티브이만 바라보았다. 


  빌고 또 빌었던 순간이 있다. 엄마의 임종 그 앞, 숨이 멎기 전까지 다시 태어나면 내 딸로 태어나 달라는 내 부탁이었다. 내 딸로 태어나서 배우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착한 아이로 살지 말고 말썽도 좀 부리고, 내가 속 썩인 만큼 속도 썩이라고.

만약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내 자식이 된다면 그때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마라맛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