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라일락 Jan 07. 2022

엄마가 남기고 간 것들

엄마의 흔적은 몇 명 되는 사람들의 이름뿐 

  엄마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가끔 핸드폰을 켠다. 맨 마지막까지 엄마가 보던 것, 쓰던 것은 무엇일까. 그러다 발견한 것이 핸드폰 속 병실 사람들의 이름들이었다. 함께 투병했던 사람들은 물론 간호사, 조무사님들의 이름. 그리고 빚을 빚으로 돌려 막던 중에 이모들에게 도움을 준 내용들(말이 좋아 도움이라고 표현했지, 돈을 한 무더기 준 것)이었다. 

  누군가의 집에 관리비, 수리비, 생활비 등 자잘한 돈들을 송금한 내역, 그것들을 왜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엄마가 남기고 간 것들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었다. 늘 끔찍이도 사람들을 생각하는 게 오지랖인 성격인 탓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래서 갚지도 않고 나 몰라라 하는 이모들을 그렇게나 많이 도와줬을까. 그러나 죽은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으로 옮길 돈이 없었다. 정확히는 우리 집 가사(재무) 담당은 엄마가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빠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카드 한 장뿐. 우리는 막내 이모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또한 그들의 것이 아니란 걸 추후에 알 수 있었다. 이모는 애초에 우리 엄마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쓸 만큼 썼고, 심지어 본인 통장과 둘째 이모의 통장으로 나누어 돈들을 옮겼다. 며칠 동안 가지고 있었었나. 

아빠의 집요한 성격에 못 이겨 통장 조회하는 걸 보고 그제야 카드를 돌려주었다. 정확히는 돌아가신 후 3600만원이라지. 엄마가 본인들에게 준 돈, 심부름 값이라고 하는데.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돈을 줄 수 있을까. 


  엄마는 ATM기다. 주고, 맡겨두고, 맡아주고, 그것도 모른 채 철저히 도움을 주는 사람. 엄마 아빠가 한동안 많이 싸웠던 이유를 이제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돈. 

아빠가 평생 동안 일한 퇴직금이며 돈의 출처를 하나도 알려주지 않아서 엄마 아빠는 시시때때로 다투었다. 

엄마는 보험일을 하면서 재테크도 열심히 했다. (병상에 있을 때 나 대신 만들어 놓은 통장이 있다며) 일러주기도 했다. 꼭 돈을 조금씩이라도 모으라는 당부와 함께.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모가 이사를 했을 때 축하금을 돈으로 송금해주기도 하고,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자신의 일들을 대신 처리해줬다며 그 값을 넉넉지 않게 주었다. 

  엄마의 흔적을 따라가면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는데, 알면 알수록 내 가슴에 못 같은 게 턱턱 박히는 느낌이 든다. 살아가며 엄마는 죽으면 돈이고 뭐고 무용지물이라고, 이제 좋은 것만 보며 살고 싶다고 했었다. 복잡한 건 싫어. 단순한 게 좋다고 말이다. 그래서 남들을 도와주다가 먼저 갔을까 싶다.

  아빠는 그 순간들이 너무나 야속해서 매일 엄마에게 묻는다. 정확히는 나를 통해 엄마에게 하늘에게 따져 묻는 거겠지.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돕고 또 돕다가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차갑게 간 모습이 떠올라서 매일 밤 티브이를 켜놓고 잠을 청한다. 


  핸드폰을 다시 열어보았다. 땡땡 선생님, 땡땡 선생님, 땡땡 간호사 선생님...

  분명 단서는 없고 남아있는 메모도 없다는 걸 알지만 가끔씩 꺼내서 저 이름들을 바라본다. 저 이름을 쓰기까지 아픔을 견디며 하나하나 핸드폰 타자를 입력했을 엄마를 생각한다. 병상에서도 누군가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기억하려고 애썼던 엄마. 걱정하지 말라며 처음으로 나와 마주 앉아 펑펑 울음을 터트렸던 모습이 어제처럼 선하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싸움이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죽은 망자의 돈에 손을 댄 사람들은 결국 돈으로 망한다고, 벌을 받는다고 들었다.

  엄마의 제사가 일주일 남짓 남았다. 나는 엄마가 써 내려간 글씨 흔적들을 눈으로 다시 한번 따라가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금쪽같은 내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