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는 서로의 대피소에 불과했다

황정은 작가의 <양의 미래>를 읽고

by 서유진



황정은 작가의 <양의 미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학생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신세로, 이야기에서는 지하에 위치한 서점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주인공은 일하던 중 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성들과 소녀를 목격하고 위화감을 느끼지만 잠깐 갈등하고 마치 전원 스위치를 끄듯, 곧 그들에게서 신경을 꺼버린다. 하지만 바로 그 소녀, ‘진주’가 실종됨으로써 주인공은 진주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비정한 어른’이 되어버린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읽으면 독자는 주인공에 대해서 알게 된다. 또 알수록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와 함께 자란 가난에 대해서, 그녀를 둘러싼 무신경한 세계에 대해서.

그러니까 그녀는 무신경한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신경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쓸 신경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무신경을 비난할 수 없다. 소설 속의

아름다운 서점도 해가 뜨기 전 일어나 해가 질 때야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에게는 의미가 없다.


‘나’가 타인과 맺는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아마 학생 때부터 다수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며 ‘시절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깨달았을 터이다.


매일 일터에서 얼굴을 보는 동료들도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 필요한 만큼의 돈을 다 벌었다는 이유 등으로 금방 동료가 아니게 되는 곳이다.


알바는 말 그대로 알바일 뿐, 평생 한 곳에 정착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혹자는 급여를 주지 않으면 고소해버리겠다는,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변모하기도 한다.

(물론 나는 알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람과의 정보다는 받을 돈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은 ‘호재’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지만,

소설의 제목과는 달리 그들은 미래지향적인 관계가 아니다.


가끔 피임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하지만, 임신에 대해서는 지금도 앞으로도 책임질 생각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제발 콘돔을 껴라 그냥)


심지어 관계를 끝맺을 때도 다투다가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용히, 끝날 것을 이미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그들의 관계는 끝난다.

호재와의 이별은 작중 주인공에게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데, 이것이 꽤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연인이라기보다 FWB (Friends With Benefits)에 가까워 보이는, 연인에도 속하지 않고 파트너라기엔 가까운 모호한 관계조차 주인공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장치로 느껴졌다.



작중 등장하는 ‘터널’이라는 공간은 주인공의 인생 전반을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터널을 끝없이 걸어가는 인생이다. 터널은 대피소가 되기도 하므로 텅 비어 있다는 속성을 갖는다. 이는 마치 주인공의 연인에 대한 태도를 연상시키게도 한다.

마치 ‘외롭다면 난 너의 대피소가 되어줄 수는 있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대피소’일 뿐이야. 우리는 서로의집이 될 수도 없고 미래가 될 수도 없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진주의 어머니에게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가까스로 참아낸다.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 써야 하냐고 분노하고 싶지만 분노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사실 세상에다가 소리쳐도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무기력해진 걸까.



어쨌거나 주인공은 수치심에 서점이라는 장소를 떠난다.주인공의 작중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계속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떠돌아다니는 양과 같은 삶을 살 것이라 유추된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엔 진주의 소식을 찾아다니면서.


비록 주인공은 사건 당시 진주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나’의 터널 속 어딘가

에서 진주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곧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없다. 호재가 길고양이들에게 곁을 내어주고 이름을 붙여주었듯이, 세상이 나에게 무심했을지언정 나는 세상의 것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나는 떳떳해지지 않을까.


주인공은 진주가 사라진 서점으로부터 도망치고 이야기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맺어 찝찝한 여운을 남긴다.



‘나’는 끝내 바람이 불어오는 벽 너머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주를 잊을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진주의 행방을 알기 위해 지세우는 ‘나’의 수많은 밤들이,

딸을 잃은 어머니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자신의 속을 깎아내더라도 삼켜버리는 작은

다정함이,

수치스러운 일로부터 수치를 느낄 수 있는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나는 언젠가 주인공이 벽 너머를 마주볼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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