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환대라는 허상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고

by 서유진


우리에게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타인에게 최대한 좋은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설령 자신의 속마음을 모른체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한정희와 나>는 그 지점을 잘 짚어낸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아내의 과거사를 듣게 됨으로써 생긴 연민의 감정을 정희에게 투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정희에게 새 운동화를 사주고, 카페에도 가고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도 한다. 마치 사이 좋은 부녀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애정 아닌 동정에서부터 비롯된 행동이다.


나는 함부로 타인을 동정하지 않으려 애쓴다. 알 수 없는 타인으로부터 동정 받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정심 속에 어느 정도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소녀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물론 주인공이 정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희 역시 주인공에게 아내의 가족을 챙길 줄 아는, 스스로가 어른스럽고 선한 존재라는 느낌과 만족감을 주지 않는가? ‘나’는 만족감을 위한 이타심으로 위장한 오만하기 그지없는 동정을 베풀고 있진 않았는가 스스로 돌아봐야만 했다.


차라리 주인공의 동정의 시선에 기반한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정희는 최소한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존감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작년쯤 인터넷에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개근 거지’라는 은어를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이를 두고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일까 질문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사회가,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밀어내려는 걸 보며 이를 내면화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희의 공격적인 언행이나 학교 폭력 사건은 평소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타인에 대한 수동 공격으로 자신을 방어해왔기에 일어난 일로 짐작되어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오갈 데 없는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 모티프는 <빨간머리 앤>이나 <위대한 유산> 같은 고전 소설에서부터 자주 등장한다. 나는 <한정희와 나>를 읽은 주에 우연의 일치로 이디스 워튼의 <여름>이라는 소설을 같이 읽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한 시골의 늙고 돈 꽤나 있는 변호사 로열이 여주인공 채리티를 어렸을 적부터 산에서 데려와 키우게 된다. 소설 속에서 산은 가난함과 지저분함, 수치스러운 곳으로 표현된다.


로열 변호사는 아내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채리티에게 청혼하고 채리티는 그런 그에게 경멸과 혐오감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이 타이밍에 채리티가 사는 시골 마을에 타지인 청년 하니가 찾아오게 되면서 둘은 소설같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니와 채리티는 다른 마을의 축제를 보러 갔다가 그 모습을 술에 취한 로열 변호사에계 들키게 되는데, 로열 변호사는 채리티에게 ‘갈보’라는 욕을 하며 채리티에게 잊을 수 없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안긴 후에 이렇게 말한다.


“ 생각 좀 해 봐라, 채리티… 넌 늘 내게 너에 대한 아무 런 권리가 없다고 말해왔지 . 그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 지 방법이 있을텐데……. 난 지금 그 문제로 너와 토론 하고 싶지는 않다 . 다만 내가 아는 사실은 난 힘 닿는 데 까지 너를 키웠고 , 언제나 너에게 호의를 베풀어 왔 다는 점이야…….

딱 한 번, 그 삼십 분 동안의 일을 제외하면 말이지 . 그 삼십 분 으로 나머지 모든 시간을 평가하는 건 부당하 잖아. 그건 너도 잘 알겠지. 그러지 않고는 네가 내 집 에서 계속 지내지 않았을 테니까… (생략)“



그렇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소설 속 ‘나’ 또한 한정희에게 언제나 호의를 베풀어 왔던 인물이기에 누군가는 한 마디로 그의 모든 시간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의 큰 아이가 자기 침대를 정희에게 양보하지 않겠다며 떼를 썼을 때부터 그녀는 ‘나’의 집에서 바닥에 요를 깔고 자야 하는 영원한 타인이다.


‘나’가 그녀에게 방 한 켠을 내주고, 가족 여행에도 데리고 다녔다고 해서 그 간극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어떠한 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어린 게 염치도 없이…”

라는 말에서 ‘나’가 은연 중에 정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드러나게 된다. 그는 결국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을 속이는 데 익숙한 어른이기 때문에 정희를 거둬 염치를 챙긴 것이다. 뭐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한정희보다는 ‘나’에 더 가까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한정희는 ‘나’의 집을 떠났다. 그녀가 간 곳은 재혼한 엄마의 집이다. 심지어 소설 초반 그녀의 엄마는 남편도 아이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정희는 그 집에서도 스스로가 가족과 유리되어 있는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또 상처 받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갈 그녀의 삶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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