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식집사의 흔한 이야기
나는 화분을 가꾼다. 돈 되는 업이 아니라 그렇지, 우리 집에서는 나름 대를 이어가는 일이다. 내가 어릴 적, 할아버지는 TV 보는 시간 외에는 온종일 베란다에서 화분을 돌보며 하루를 보냈다. 베란다는 항상 화분으로 가득 차있었고, 할아버지는 모종삽과 전지가위를 들고 그 많은 화분을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며 다듬고 가꾸었다. 어느 화분 하나 같은 식물이 없었다.
할머니는 평소에 그런 할아버지를 두고, 먹지도 못하고 돈도 안 나오는 걸 평생 옆구리에 끼고 산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베란다에 나가 있는 할아버지 몰래, 입가에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달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옛날에 시골집 마당에는 시상 꽃나무란 꽃나무는 몽땅 모다 놨제. 그것들이 동네서 젤로 이쁘게 컸당께. 느그 할아버지가 집에 없는 꽃나무만 보믄 꼬옥 하나 얻어와 심고는, 워메, 참말 정성 들여서 가꿨었는디. 거그 떠나고 여그 와서도 꼭 같아야."
식집사의 고독한 길은 대를 이어 우리 아빠에게로, 나에게로 전해졌다. 아빠는 엄마와 긴 여행이라도 갈 때면, 나에게 집안에 화분을 부탁하면서 끝도 없는 당부를 남긴다.
"물 줄 때, 한꺼번에 확 부어버리지 말고, 조금씩, 흘리듯이, 시간 들여서 줘야 한다.
"걱정 마세요. 한두 번 주나."
"그리고 화분받침에 흘러나온 물은 고여있게 두지 말고 치워주고."
"오키오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베란다 뒤쪽에도 화분 많이 있으니까 그것도 잊어버리지 말고 챙겨."
"아이고! 알았어요. 1절만 하셔!"
이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그렇고, 아빠와 나도 각자 식집사로서 자기만의 추구미(?)가 있다. 할아버지는 정말 꼼꼼하게, 끝이 조금 타들어간 이파리 하나도 내버려 두지 않고 다듬었다. 화분 방향을 매일 손수 돌려가며 귀한 아기 돌보듯 키웠다. 할아버지의 화분들은 크지 않았다. 다만 잎이 유난히 아기자기한 것, 꽃이 예쁜 것, 가지가 유려한 것, 각자만의 특성이 있었다. 비싼 종은 아니지만 그래도 흔치는 않은, 이름 모를 식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이 가진 최상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탐미주의적 식집사였다.
아빠는 큼직큼직하고 깔끔한 형태 나무들을 쑥쑥 키운다. 떡갈고무나무, 뱅갈고무나무, 인도고무나무 등 고무 시리즈는 나란히 서서 천장에 닿을까 조마조마할 만큼 높이 컸다. 킹벤자민은 수형을 잘 잡아 폭포수 쏟아지듯 잔가지와 이파리를 풍성하게 늘어뜨렸다. 해피트리, 녹보수, 아레카야자... 아빠의 화분은 늘 쭉쭉 뻗어 나간다.
내 화분들에서는 각종 풀떼기가 잘도 자라고 있다. 라벤더, 애플민트, 바질, 보스턴고사리, 푸미라, 트리안, 스킨답서스. 아이비, 호야, 몬스테라, 필로덴드론, 알로카시아... 아빠는 내 식물 취향이 조잡스럽다며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웃지만, 하잘것없는 풀떼기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이 얼마나 뿌듯한 것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한 번씩 여름을 잘 치러내고 나면, 나는 내가 정글을 양성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셋이 모두 한 집에 살고 있을 때, 우리가 실제 그렇게 살던 날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셋이 마당을 사이좋게 삼등분하여 각자의 정원을 꾸몄더라면 어땠을까. 서로 내가 키운 식물이 더 예쁘고 싱그럽다고 뽐낼 수 있었더라면... 그것 참 볼만한 광경이었을 것 같다.
또 한 주가 시작되었다. 화분에 물이나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