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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먹을 것을 입에 물고 태어난, 그런 식물도 있다.

스킨답서스 이야기

by 정벼리

기침과 사랑은 감출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랑을 담은 눈빛은 티가 나기 마련이고, 사랑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식집사의 정체성은 집밖에서도 티가 난다. 사무실에서 누구든 선물받은 화분을 방치하여 식물이 서서히 말라 죽고 있으면, 나는 혼자 안절부절하다가 보다못해 이렇게 묻게 된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화분 제가 물 주면서 계속 살려도(?) 될까요?"


화분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면, 그 뒤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화분을 관리하는 이른바 '생명 연장 프로젝트'에 들어선다. 하지만 늘상 업무에 바쁘기도 하고, 정식으로 위임(??) 받았다고 해도 남의 화분을 멋대로 다룰 수는 노릇이니, 관리라고 해봤자 흙이 마를 때 즈음 물을 주는 정도일 뿐이다. 굳이 뭔가 더 해주고 싶다면 일년에 한 두번 액상비료를 꽂아주기도 한다. 별것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식물들은 삐뚤빼뚤 조금 웃자랄지언정 죽지는 않는다. 그러다 화분 주인이 인사발령으로 사무실을 떠날 때면, 많은 경우 나에게 화분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괜찮으시다면, 얘는 벼리 님이 계속 키우시는게 어떨까요? 저는 가져가봤자 곧 죽일 것 같아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유기된 화분을 순차 임시보호하다보니, 사무실에 주인 없이도 씩씩하게 살고 있는 화분이 십수개가 되었다. 평상시에는 점심시간에 내가 물을 주는데, 가끔 긴 연차나 교육에 들어가게 되면 별 도리가 없다. 내버려두고 다녀오면 다 죽어가는 축 쳐진 이파리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친한 동료에게 나 없는 동안 임보 대상들에게 물주기 좀 챙겨달라 부탁을 한다. 그래도 돌아와보면 꼭 한 두개씩은 비실비실 죽어가고 있다. 동료는 몹시 억울해하며 부탁받은 대로 성실하게 물을 주었는데 왜 시드는 거냐고, 물주는 요령이 뭐냐고 묻기도 한다. 요령이 어딨나. 그냥 물 줄 시기에 적당량 주면 되는걸.

(물론 적당한 시기와 양을 맞추는 감은 필요하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어쨌든, 이렇게 밖에서도 감춰지지 않는 식집사의 면모 덕택에 가끔 사람들이 식물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집에 화분이 몇 개에요, 언제부터 화분을 가꾸었나요, 요즘 유행하는 OO을 키워본 적이 있나요...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초보자가 쉽게 키울만한 식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스킨답서스를 권한다.


IMG_2743.jpeg 내버려둬도 쑥쑥 잘도 자라는 스킨답서스


스킨답서스는 생명력이 아주 강한 식물이다. 밝은 창가에서도, 조금 어두운 테이블 위에서도 스스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서 자란다. 물 주기를 며칠 잊어 화분이 바싹 말라도 억척스럽게 버티며 주인이 허둥지둥 물조리개를 가져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다. 어쩌다 너무 자주 물을 줘서 과습이 되어도 흙이 적당히 마를 때까지 꿋꿋하게 버틴다. 물주기를 아주 영영 잊어버리지만 않는 이상 대충 내버려둬도 그저 잘 자라는 아이다. 병충해도 거의 없다. 이 정도의 관리도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초록한 식물 하나 쯤은 집에 두고 싶다면 스킨답서스 줄기를 뎅강 잘라 물병에 꽂아두길 권한다. 어느새 하얀 뿌리를 내며 적응해서 새 잎을 틔울 것이다.


강인한 생명력 외에도 스킨답서스를 추천하는 이유는 더 있다. 키우는 이의 마음이 가는대로 모양과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덩쿨식물이라 지지봉이나 벽을 타고 올라가게 하여 키울 수도 있고, 화분을 높은 곳에 두고 늘어뜨리며 키울 수도 있다.


종류도 꽤 어려가지다. 일반적으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그린 스킨답서스는 짙은 녹색 잎이지만, 네온은 형광 연두빛을 띄고, 무늬 스킨이라고도 알려진 엔조이는 아름다운 무늬를 뽐낸다. 만줄라는 잎에서 흰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서 우아한 느낌이고, 아르지리우스는 잎에 새겨진 은빛 무늬가 오묘하게 반짝이며 빛난다. 종류에 따라 잎이 큼지막하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종을 키우냐에 따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다양한 매력을 뽐내면서도 키우는 난이도는 난이도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쉬우니 초보자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은 조금 오래된 구축 아파트이다. 거실 베란다가 확장되어 있지만, 본래 베란다와 거실 경계선 양측에 내력벽이 요철처럼 툭 튀어 나와있다. 이사온 뒤 가구를 배치하고 보니, 장식장이 내력벽 안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전 집에서처럼 장식장 위에 화분을 두어 키우고 싶은데, 맞닿은 내력벽이 햇빛을 막아 예민한 식물은 자라기 어려울 듯 했다. 큰 고민 없이 화원에 들러 스킨답서스 포트를 두 개 사왔다. 둥그런 화분에 예쁘게 옮겨 심어주었다. 고작 일년 반 만에 커튼처럼 드리워져 어여쁘고도 풍성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플랜테리어를 꿈꾸지만 손만 닿아도 자꾸 식물이 죽는다는 식물계의 마이다스들에게 권하고 싶다.


"스킨답서스를 들이세요. 얘는 제 먹을 것을 스스로 입에 물고 태어난 식물이랍니다. 제 말 한 번만 믿어보세요. 당신에게는 스킨답서스가 딱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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