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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농약사 가는 길

브레이니아 이야기

by 정벼리

곧 여름이었다. 입사 후 내리 같은 동네에서만 근무를 하다가 새로운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발붙여 본 적 없는 동네였다. 시골이라고 감히 부를 수 없는 엄연한 도시였지만, 오래되고 낡은 곳이었다. 초등학교 이래로 늘 지중화작업이 마쳐진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기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시야에 들어차는 전봇대 사이사이 얽힌 전깃줄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내가 떨궈진 도시는 세월의 흔적을 가득 담고 있었다.


생경하고 낯선 것은 환경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도 낯설었다. 아직 심리적 거리감을 전혀 좁히지 못한 새로운 동료들 사이에서, 나 혼자 그냥 위축되고는 했다. 활발한 예전의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수 없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도 사회생활의 연장으로 느껴진 어느 날, 시곗바늘이 정오를 가리키자마자 급히 볼 일이 생겼다며 사무실을 홀로 빠져나왔다.


급한 일은 당연히 없었다. 특별히 갈 곳도 없어서, 나는 지도앱을 켜고 일전에 봐둔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초입에 종묘농약사가 하나 있다고 했다. 이전 근무지에서 소중히 싸들고 온 브레이니아 화분에 뿌리파리가 생겨서 찾아보았다. 끊이지 않는 잡생각처럼, 뿌리파리는 잡아도 잡아도 또 생겨났다. 집중해서 일을 할만하면 눈앞을 왔다 갔다 날아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과산화수소수를 희석시켜 부어보고, 인터넷에서 주문한 살충제를 써보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도 도무지 없어지지 않았다. 이제 남은 방법이라고는 농약 밖에 없을 듯했다.


햇빛이 따가웠다. 보도블록은 울퉁불퉁 어긋난 곳이 많았고, 사이사이마다 잡초가 비죽비죽 자라나 있었다. 오른쪽 6차선 도로에서는 시끄러운 소음이 계속되었고, 왼쪽은 높은 공사장 펜스로 가로막혀 있었다. 펜스 뒤로는 미군이 나간 자리가 휑뎅그레 빈 공터로 남아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걷기 좋은 길은 아니었다. 시장까지는 1.5킬로 남짓이라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다. 땀이 솟아나고, 짜증도 같이 송송 솟아났다.




지금이라도 택시를 부를까 하는 고민을 몇 번이나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벼리 님! 잘 지내요? 나예요."
"어머, O 님! 반가워요. 정말 너무 반갑다. 어쩐 일이에요?"
"우리 자주 가던 화원에 들렀는데, 벼리 님 생각이 나서 전화했죠.'
"힝... 저도 너무 보고 싶어요."
"밖이에요? 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네. 저 농약사 가는 길이에요, 푸흡!"
"뭐라고요? 아니, 거기 농약사가 있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가까운데 시장이 있는데, 거기 종묘농약사가 있더라고요. 전에 우리 같이 찾아봤던 뿌리파리에 직방이라는 그 농약 있잖아요. 저 그거 사보려고요."
"어머어머, 여기는 가까운데 농약사 없어서 그동안 한 번 써보고 싶어도 못 샀잖아요. 대박이다!"
"O 님이 나눠줬던 브레이니아요. 꽤 자라서 분갈이했는데, 흙에 뿌리파리가 있었나 봐요. 끝없이 나와요. 꼭 없애주고 말 거예요."


재잘재잘 수다가 끝이 없었다. O와 떠드는 동안,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던 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저기 큰길 건너 시장 입구가 보였다. 더위에 말라버린 마음이 다독다독 채워진 기분이었다.




O는 예전 근무지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인데, 그녀도 어디에서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식집사라서 우리는 종종 함께 화원에 들렀다. 나누고 싶은 예쁜 식물은 가지치기 후 물꽂이를 하여 뿌리를 낸 뒤 서로 선물하고는 했다. 뿌리파리로 고통받고 있는 브레이니아도 원래 O가 나눠준 새끼손가락 길이만큼의 작고 여린 한 가닥 가지였다.


일회용 커피컵에 물구멍을 뽕뽕 뚫어 심겨온 브레이니아를 살살 키워, 처음 7호 토분에 옮겨 심고 몇 가지 미니어처 데코로 꾸며 O에게 선보였을 때, 그녀는 입꼬리를 정수리 끝까지 올릴 듯 커다랗게 웃었다. 브레이니아를 나눔 받은 것은 나였는데, 표정으로는 O가 나에게 선물이라도 받은 듯했다.


그녀가 내게 건냈던 브레이니아 한 가닥


나는 그날 땀을 한 바가지 쏟으며 무사히 농약을 사 왔다. 혹시라도 과용될까 손을 달달 떨며 딱 한 방울을 물에 희석시켜 브레이니아 화분에 주었다. 며칠 만에 뿌리파리는 싹 사라졌다. 그 뒤로 나와 브레이니아는 서로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이곳에 적응하고 뿌리를 내려왔다. 브레이니아의 가느다랗던 줄기는 이제 제법 튼튼한 나무기둥 테가 난다. 그리고 초록 바탕에 흰 무늬가 시원하게 퍼진 작은 잎들은 언제든 O의 커다란 웃음을 떠올리게 한다. 땡볕 아래 지친 마음을 채워주었던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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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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