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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도 열매를 맺겠지

올리브 나무 이야기

by 정벼리

* 이 글에는 영화 <마션(The Martian, 2015)>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마션(The Martian, 2015)>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화성 탐사 중 거대 폭풍에 휘말린다. 그의 동료들은 와트니가 임무 중 사망한 것으로 오해하고, 와트니를 남겨둔 채 화성을 탈출한다. 하지만 와트니는 부상을 입었을 뿐 살아있었고, 혼자 남겨진 채 화성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와트니는 한동안 우주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조선이 올 때까지 버틸 수가 없다. 지구와 화성은 너무 멀다. 스스로 식량을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와트니는 식물학자로서의 전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화학반응으로 물을 만들고 자신의 배설물을 이용해 감자 농사를 짓는다.


첫 감자 싹을 틔워냈을 때 와트니는 얼마나 환희에 찼을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을 것이다. 가빠지는 호흡을 고르며 감자 싹 앞에 쪼그려 앉아, 기적을 목도하는 양치기의 마음으로 새싹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아, 살았다, 하며.


와트니에게 감자는 어떤 존재였을까. 화성에 생명체라고는 나를 제외하면 내가 키우는 감자뿐이라니. 감자 잎이 쑥쑥 자라날 때 느꼈을 감정은 단순히 식량이 생긴다는 안도감에만 그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감자가 잘 영글지 노심초사하면서도, 매일 자라나는 감자 잎이 얼마나 반갑고 기특했을까. 너랑 나랑 같이 버텨보자, 우리 둘 다 살아남자... 감자는 어쩌면 배구공 윌슨에 버금가는 정신적 동반자가 아니었을지. 이렇게 말하는 건 생존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자의 지나친 낭만주의일까.




잠시 화성에서의 감자농사를 언급했지만, 오늘의 주인공이 감자는 아니다. 잎도 열매도 감자보다 작지만, 드리우는 그늘만큼은 압도적으로 커질 수 있는 올리브 나무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사실 감자는 열매가 아니라 뿌리지만, 그냥 그렇다고 치고.)


화성에 홀로 남겨져도 감자를 키우며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낯선 곳에 뚝 떨어지더라도 그곳이 지구 어딘가인 이상 어려울 것은 없다. 살다 보면 그냥 다 살아진다. 어디서건 새로운 인연은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고, 정 붙일 구석도 꼭 나타난다.


몇 해 전, 직장 문제로 조금 급하게 이사를 했다. 아이가 아직 학기 중이어서, 가족이 한꺼번에 옮겨오지 못했다.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퇴근 후 텅 빈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혼자 잠드는 게 너무 어색하고 외로웠다. 마치 향수병에 걸린 유학생처럼 굴었다. 종일 밥도 잘 안 넘어가고, 마음이 공허했다. 그런 내 속앓이를 함께 일하는 H는 진작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느 날 퇴근 무렵, H는 줄 게 있다며 주차장으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주차장까지 가서 줄 것이 무어냐 몇 번을 물어도, H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일단 따라오라며 앞장을 섰다. H는 조수석에서 조심스럽게 종이 포장된 꾸러미를 꺼내 무작정 내 품에 안겼다. 노끈으로 묶인 크라프트지 끄트머리로 빼꼼, 작은 이파리들이 붙은 흰 목대가 솟아 있었다. 올리브 나무 묘목이었다.


"이사하셨잖아요. 새로운 동네, 새 집에 오셨으니 새로운 식물도 하나 들이면 좋겠다 싶어서요. 식물 키우기 좋아하시죠? 별 것 아니지만, 이사 선물이에요."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꽁꽁 감추고 있던 약해진 마음이 쏟아질까 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후에야 간신히 대답했다.


"우와, 너무 예뻐요. 고마워서 어쩌죠. 저 올리브 나무는 처음인데, 잘 키워볼게요. 답례로 제가 내일 점심 살게요. 우리 맛있는 것 먹으러 가요."


몇 달 뒤 남편과 아이가 구조선처럼 나에게 올 때까지, 올리브 나무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네가 맺는 열매는 얼마나 영글까


아직도 나의 올리브 나무는 압도적 그림자를 드리우기엔 너무 작고 귀엽다. 열매는커녕 꽃도 한 번 피우지 못했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 아래가 아니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목대도 여전히 얄상하다. 그래도 우리 집의 가장 남쪽 창가에서 햇살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다. 급할 것은 없다. 올리브나무는 수백년을 산다니까.


진득하게 자라다보면 언젠가 너도 열매를 맺겠지. 기왕이면 화분을 떠나 땅에 심겨 아름드리 그늘도 선사할 수 있을 만큼 크게 자랄 수 있다면 좋겠다. 네가 맺는 열매는 얼마나 영글까. 그날까지 토닥토닥, 내가 곁에 있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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