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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요망한 배우견이 산다

이 정도면 연기 천재 아니야?

by 정벼리

옛날에는 다른 사람들이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며 얼마나 귀여운지 이런저런 이야기해 주었을 때, 그게 얼마나 치명적 에피소드들인지 뼛속까지 체감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기억에 남은 몇몇 강아지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학교 다닐 때 동기 언니가 키우던 구름이 이야기이다.


구름이는 언니가 코찔찔이 초등학생 시절, 학교 앞 가판대에서 용돈을 탈털 털어주고 데려온 아기 강아지였다고 한다. 언니네 엄마는 혼비백산하며, (비슷한 상황에 처한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러하듯) 집 안에서 절대로 강아지를 키울 수 없다며 당장 돌려주고 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발 키우게 해 달라는 코찔찔이와 완강한 엄마의 옥신각신이 이어지다 하루 해가 저물었고, 결국 코찔찔이 언니는 하룻밤만 강아지를 데리고 있고 다음 날 아저씨에게 돌려주고 오겠노라 엄마와 약속을 한다. 그러나 다음 날, 강아지를 팔던 아저씨가 여즉 그 자리에 있을 리가 있나. 강아지를 돌려줄 길이 없었다. 엄마의 한숨을 뒤로하고, 언니는 방문 뒤에 숨어 구름이를 끌어안은 채 이제 나도 강아지가 생겼다며 개다리춤을 추었다고 한다.


구름이는 선천적으로 왼쪽 뒷다리가 약하게 태어나,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기 강아지가 배탈만 나도 안쓰러운 법인데, 큰 수술을 받았으니 온 가족이 얼마나 애지중지 돌봐주었을까. 처음에는 구름이를 당장 돌려보내라고 했던 엄마도 수술 후 걷지 못하는 구름이를 위해 온갖 특별식을 만들어주며 한껏 예뻐해 주셨다고 했다. 아마도 구름이의 기억 속에는 그때가 가족들이 자신에게 가장 너그러웠던 때로 남았나 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노견이 된 이후에도 구름이는 말썽을 부려 혼날 때면 갑자기 왼쪽 뒷다리를 절뚝거리며 다리를 저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다리가 아픈 척하면 가족들이 저를 혼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말이다. 그 모습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혼내기를 그만두면, 구름이는 심하게 다리를 절뚝이며 걷다가 점점 절뚝이는 정도가 약해지며 어느덧 멀쩡하게 걷고 있었다나 뭐라나. 강아지계의 유주얼 서스펙트가 따로 없다며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알고보니 연기는 일부 천재견들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었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지능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 호두도 아주 요망하게 연기를 펼친다.


호두가 가장 자신 있는 연기는 처절한 이별씬이다. 호두는 호들갑스러운 이별연기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펼친다. 아침에 가족들의 출근과 등교 배웅할 때, 오후에 남편과 내가 운동 나갈 때, 그리고 자러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적어도 1일 3회의 공연을 펼치는데, 아주 세상 다시 못 만날 사이가 되는 것처럼 처연함이 가득한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보며 히잉, 흐느낀다. 구슬프기 짝이 없다.


물론 보호자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진심이야 당연히 섞여 있겠지만, 문제는 호두는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0.1초의 미련도 없이 휙 돌아선다는 것이다. 내가 언제 가족들한테 가지 말라는 태도를 취했냐는 것처럼 상황 종료 즉시 제 장난감을 가지러 도도도 뛰어가든지 늘어지게 낮잠을 자러 방석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불리불안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가도, 가끔 홈캠으로 살펴보는 호두 모습은 현관문이 닫히기 전과 후가 무슨 지킬박사와 하이드 급으로 돌변하는 인격, 아니 견격처럼 보여 어이가 없을 정도다.


배우견.png 이제야 다 나갔네. 오늘도 이별 연기 찐하게 펼쳤으니, 이제 신나게 놀아볼까?


하긴, 평상시에도 연기가 생활화되어있다.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척 바보 연기가 아주 능청스럽다. 간식을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앉아, 엎드려, 기다려, 이리 와, 돌아, 코, 빵야, 손 등등 별 재주를 다 부리면서, 간식이 없을 때에는 하나도 못 알아 듣는 척한다. 아무리 이리 와, 앉아, 외쳐봐도 고개만 갸웃거리면서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응? 뭐라는 거야? 호두는 사람 말을 몰라서, 엄마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요망하기 짝이 없는 녀석. 오늘도 가족들은 호두를 보며 귀엽다가, 얄밉다가, 귀찮다가, 박수를 쳤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하고 있지만, 누가 아나.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요망한 호두의 머릿속에서 다 계획된 판일지도 모른다.



*알림*

추석 연휴를 맞아, 다음 주 한 주간 <멍멍아, 친해질 수 있을까>는 쉬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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