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 말썽을 부려도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
호두는 이제 제법 자랐다. 덩치도 늘고, 고집도 부쩍 세졌다. 이제는 싫은 건 죽어도 못 하겠다는 태도가 분명하다. 강아지 주제에 똥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얼마나 얄미운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대표적인 예가 발톱 깎기다.
예전에는 가장 좋아하는 북어 간식을 보여주면 못 이기는 척 발을 내준 채 참고 있긴 했다. 간식을 먹고 싶은 마음에 발톱 하나가 깎일 때마다 힝힝 울상을 지으면서도 참고 버틴 것이다. 어느 날부터는 슬슬 간식을 주어도 어떻게든 간식 한 두 개만 먼저 얻어먹고는 발은 꾹 감춰버린다. 발톱만은 절대 못 내놓는다는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는 호두와 며칠째 씨름하다가, 결국 내가 포기했다. 괜히 더 붙잡다가는 호두가 다칠 것만 같아서.
내 손에서 벗어나 의기양양하게 거실을 활보하는 호두로부터 차라락, 차라락. 발톱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 깎게 하면 네 발톱을 내가 내버려 둘 줄 알았냐. 오랜만에 호두에게 미용실 방문형이 선고되었다. 호두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장소인 미용실에서 강제로 발톱 깎이면서 반성 좀 해보라지.
(tmi. 첫 번째로 싫어하는 장소는 동물병원이다.)
미용실에 도착하자 호두는 운명을 예감했다. 몸을 뒤틀고, 발버둥을 쳤다. 사장님이 웃으며 다가오자, 끼이잉, 소리를 내며 더욱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사장님이 괴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안 가겠다며 내 품을 네 발로 할퀴며 어깨 위로 기어오른다. 고양이도 아닌데 미용실 한 번 보내려면 팔뚝에 스크래치가 한가득이다.
15분 남짓 짧은 위생미용이건만, 다녀와서 호두는 완전히 삐져버렸다. 일부러 매트 한가운데 오줌을 싸놓거나, 물을 마시면서 오만 데 물방울을 흩뿌려놓고, 사료 알갱이도 일부러 씹다 말고 흩어 놓는다. 제 기분이 상했다는 표시다. 뒤치닥거리를 하다보면 슬슬 부아가 치민다.
몇 번째 청소기를 돌린건지, 나는 호두를 째려보면서 소파에 앉았다. 호두는 슬금슬금 다가와 다리 사이를 파고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눈치를 살핀다. '나 그래도 미용실도 다녀왔는데, 안아줄 거지?’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된통 혼내주려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그 눈빛을 보면 스르륵 마음이 풀리고 만다.
가만 보면 호두는 자기가 언제 가장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정확히 아는 것 같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금세 용서받을 수 있는 표정, 간식을 얻어낼 수 있는 눈빛, 외출할 때 데리고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간절한 얼굴...
싱크대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을 때면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다가와, 시키지 않아도 세상 착한 표정으로 내 옆에 착 붙어 앉아 있는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면서 기다리는 표정은 꼭 '나 여기 착하게 앉아있는데, 채소 안 줘?'하고 묻는 것 같다. 자르던 채소 한 조각을 내어주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혼나고 난 뒤에도 얄밉도록 귀엽다. 티슈를 죄다 물어뜯어 방 안이 종잇조각 천지가 되었던 날, 화를 내며 호두를 꾸짖었는데, 이 녀석은 금세 꼬리를 살살 흔들며 다가와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다. ‘알았어, 나 잘못했어, 근데 한 번만 안아줄래?’ 그 표정 앞에서 화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정말 치명적이기 짝이 없다. 결정적 순간마다 꼭 그 타이밍 맞춰 더 사랑스러운 얼굴을 내민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표정 앞에서 나는 늘 항복하고 만다. 오늘도 호두는 글 쓰는 내 발치 옆에 착 달라붙어 예쁜 얼굴을 들이민다. 이번엔 또 뭘 달라고 그러는지. 못 이기는 척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얄미운데 진짜 이쁘다. 그래, 네 예쁜 얼굴은 항상 옳아. 이리 와서 간식이나 먹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