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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물어뜯는 파괴왕 호두

어디까지 물어뜯을 셈이냐

by 정벼리

생후 1년도 채 되지 않은 강아지는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다. 눈에 보이는 건 일단 냄새 맡고, 코를 떼면 곧 입이 가닿는다. 이갈이 시기가 겹치니 호기심은 주체할 수 없는 ‘물어뜯기 본능’으로 폭발한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그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한 마리의 파괴왕이 살고 있다. 오늘은 호두가 망가뜨린 집안 살림살이에 대해 신세한탄을 좀 해볼까 한다.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벽지였다. 어느 날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니, 거실 벽 모서리가 너덜너덜하게 뜯겨 있었다. 정말 기절초풍했다. 벽지 뜯는 강아지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벽지 뜯기가 습관이 되어버리는 순간 집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했다. 부랴부랴 접착제 없이도 정전기를 이용해 벽에 붙일 수 있는 비닐을 한 롤 주문해, 호두의 입이 닿을 만한 벽은 전부 감싸놨다. 그 덕에 더 이상 벽지가 뜯기지는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말 그대로 인테리어는 개나 준 꼴이 되어버렸다. 거실 바닥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며 한숨을 내쉰 이후로 또다시 복잡한 심경이 찾아들었다.


벽에 붙이고 남은 비닐은 창고에 고이 모셔 놓았다. 나중에 또 비닐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나중'은 고작 며칠 만에 다가왔다. 벽지 뜯기를 막았다고 호두의 파괴본능이 어디 갈 리가 있나. 호두는 새로운 표적을 찾았다. 이번엔 식탁 다리였다. 표면 도장이 갈려 뽀얀 나무 속살이 드러난 식탁 다리에 아쉬운 대로 아이 크레파스를 꺼내와 대충 색칠을 했다. 그리고 창고에 남아 있던 비닐을 꺼내 칭칭 감아두었다. 벽에서 식탁으로 이어지는 비닐 인테리어라니.


너 딱 걸렸어, 파괴왕 호두 녀석!


다음 희생자는 리모컨, 그것도 몇 달 전 큰맘 먹고 산 예쁜 신상 선풍기의 리모컨이었다. 풍량 조절부터 타이머, 상하좌우 각도조절까지 모두 리모컨으로 조정할 수 있어서, 소파 위에 드러누워 선풍기를 조정하며 두어 달간 신기술을 만끽했었다. 그런데 그 리모컨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소파 주변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리모컨은 나타나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여겼는데 저 멀리 강아지 방석 밑에서 네 모서리가 다 뜯겨 버튼만 겨우 살아 있는, 반쯤 좀비가 된 리모컨이 발견되었다. 어떤 버튼을 눌러도 전원만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으휴, 내가 못살아. 분통을 터뜨리며 쓰레기통에 리모컨을 내던졌다가 그나마 전원이라도 켜야지 싶어 슬그머니 다시 주워왔다.


대체 호두가 리모컨을 어떻게 가져갔을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뒤, 거실 테이블 끄트머리에 앞발을 걸치고 두발서기를 시전하는 호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앞발을 파바박 구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이놈! 혼내는 소리에 얼른 바닥에 네발로 서서 딴청을 피웠다. 능청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혹시라도 모를 테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굳은 결심으로 집을 치웠다. 거실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인 티슈곽을 빼고는 아무런 물건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망가지면 안 될 물건은 모두 호두가 닿을 수 없는 높은 선반이나 서랍장으로 옮겨두었다. 잠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지만, 역시 방심은 금물이다. 어느 날 퇴근 후 현관문을 여니, 눈앞에 흰색 눈보라가 휘몰아친 듯한 거실 풍경이 펼쳐졌다. 호두가 티슈곽을 끄집어내 수십 장의 휴지를 산산이 찢어놓은 것이었다.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몸이 굳었다.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났다. 퇴근한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방방 뛰던 호두는 순식간에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내 눈을 피했다. 온 거실에 날리는 휴지 쪼가리를 모아 치우며 투덜투덜거리는데, 호두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든지 말든지 무시하자, 쪼그리고 앉아있는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다. 어휴, 진짜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


언제까지 물어뜯고 망가뜨릴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두의 파괴왕 모드는 오늘까진 여전히 유효하다. 바닥도 여기저기 찍혔고, 어디서 물어왔는지 아이의 연필도 몇 자루나 개껌 씹듯 야무지게 씹힌 채 발견되었다. 그래놓고는 혼날 땐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시무룩해지는 모습을 보면 헛웃음이 난다. 맨날 혼나면서 대체 왜 그렇게 다 물어뜯는 거야. 어디까지 사고를 칠 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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