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대만은 알고 있을 이 내 마음

장미허브 이야기

by 정벼리

엄마는 참다 참다 폭발한듯, 젊은 나에게 물었다. 네가 뭐가 부족하다고 그러냐고, 꼭 걔랑 결혼을 해야겠냐고. 나는 답했다. 나는 쟤 아니면 안 될 거 같아. 엄마는 다시 물었다. 걔가 뭐 하나 잘난 것이 있냐고.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잘난 게 없어서는 아니었다. 가슴속에는 수백 가지 기억과 생각과 감정이 뒤섞였지만, 그것들을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내가 꺼내 놓은 단어 하나는 고작 그거였다. 착하고 순해.


그는 좋은 사람이다. 이런저런 조건으로는 대단하게 내세울 것은 없는 참말로 평범한 남자라, 그의 진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깨를 맞대고 긴 시간 걸어보아야, 마주 앉아 셀 수 없이 많은 끼니를 나누어야, 너무 기뻐서 팔짝팔짝 뛰는 날과 너무 슬퍼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꺼이꺼이 우는 날을 그와 함께 몇 번이나 겪어보아야 그의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꼭 장미허브 같다. 보잘것없어서 그냥 봐선 눈에 차지 않지만, 진가를 알고 나면 하염없이 곁에 둘 수밖에 없는 그 식물 말이다. 장미허브의 매력은 한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인 향기에 있다. 시트러스 계열의 상큼하고 신선한 청량감에 사과향 같은 달콤함이 뒤섞여 있고, 그 끝에는 시원하고 상쾌한 민트 향이 남는다. 하지만 장미허브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그 향을 알 수 없다. 손을 대야 향을 느낄 수 있다. 잎을 슬슬 쓸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털이 쭈삣 설 정도로 싱그러운 향이 가득 퍼진다.


솜털이 송송 난 장미허브. 걱정 말라고, 네 마음은 내가 알고 있으니.


그를 만난 것은 이십여 년 전의 늦가을이었다. 계절이 겨울의 문턱에 발을 걸칠까 말까 고민하는 그런 스산한 바람이 부는 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뭐 귀공자 같이 말갛고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해서 그런지 조금 뚝딱거렸고, 어쩌다 웃으면 눈가에 길게 주름이 잡혀 순해 보였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가 네 전화번호를 물어보는데, 알려주어도 괜찮겠냐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면서도, 새침하게 모르는 척 여상히 말했더랬다. 그냥 전화번호인데, 안 될 건 또 뭐야. 그날 이후 우리는 줄기차게 만나서, 신촌 종로 명동 서촌 압구정 강남... 온 서울 시내를 함께 쏘다녔다.


흔히들 찬란하다고 말하는 젊은 날의 대부분을 그와 함께 했다. 아직 손에 쥔 젊음이 조금은 남아서 아쉬움이 덜한 건지, 지난 날들이 그렇게 찬란할 것까지야 싶다. 아직 나는 무엇도 누구도 아닌데, 자꾸 무언가 또는 누군가가 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아 불안하고, 때로 고통스러웠다. 갑자기 절대자가 나타나 시간을 되돌려주겠다고 제안한다면, 나는 손사래 치며 홀라당 도망이라도 가버릴 것이다. 절대 안 되지. 내가 어떻게 그 시간들을 지나왔는데.


그 시간들 안에서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에서 세상이 나에게 재수 없게 굴 때마다, 나는 딱 그만큼 까칠하게 구는 것으로 되갚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시를 곤두세운 내 손을 잡고 조용히, 눈가에 긴 주름을 잡으며 웃어 주었다. 언제나 같은 온도로 그 자리에서, 괜찮아, 다독이면서.


유난히 마음이 뾰족하게 곤두섰던 어느 날에 그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었다. 뭐가 괜찮아, 오빠가 뭘 알아,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뭐 그렇게 맨날 대책 없이 긍정적이야, 잘 안되면 오빠가 어쩔 건데, 어떡할 거냐고... 한바탕 쏟아내고 격정이 사그라들자, 분노가 빠져나간 자리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찾아들었다. 쭈삣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나에게 그는 그대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너는 못되게 굴 때도 예뻐. 그 순간이었다. 이 사람을 놓치면 나는 평생 후회하겠구나 싶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며칠 전.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하찮은 일 때문에 나는 꼬라지가 나있었다. 이마를 잔뜩 찌푸린 나를 보고 남편은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 못생겨질 거라고 놀렸다. 못되게 굴 때도 예쁘다고 할 땐 언제고 그러냐며 쏘아보니,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웃고 있으면 더 예쁘니 그렇지. 수줍음 많던 청년은 언제 저렇게 능청맞은 아저씨가 되었을까.


장미허브의 꽃말도 능청스럽기 짝이 없다. '나의 마음은 그대만이 알고 있네.'


어느덧 인생에서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그를 몰랐던 시간보다 더 길어졌다. 긴 시간, 그는 한결같이 좋은 이였다. 멀찍이서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그의 내면을 이제 나는 안다. 수더분한 미소 뒤에 자리한 단단함과 선함, 정직함, 우직함 뭐 그런 것들. 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 내 마음은 그가 알아주리라 믿는다. 우리 오래오래 지금처럼 서로에게 좋은 이이길. 언제까지나 아찔한 향기로 남길.




keyword
토, 일 연재
이전 18화미리 밝히지만 제 취향은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