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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면 고구마줄기가 먹고 싶어

아마그리스 이야기

by 정벼리

나물 반찬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고구마줄기만큼은 예외다. 어쩌다 밥상에서 만나면 부드럽고 삼삼한 게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다. 사실 고구마줄기 나물이 무슨 대단한 맛이 있겠냐만, 아니 오히려 맛으로만 따지면 특별한 향도 맛도 없는 것이 고구마 줄기이다. 맛보다는 부드러운 식감과 무칠 때 들어간 파, 마늘, 기름 향으로 먹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마줄기에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은 역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어릴 적 할머니나 엄마가 시장에서 고구마줄기를 한 봉지 사 오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고구마줄기 껍질 벗기기가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고구마줄기는 사 오자마자 바로 조리에 들어갈 수 없고, 겉껍질 벗기기라는 지난한 손질 과정을 거쳐야 한다. 껍질이 질겨서 벗겨내지 않고는 먹기 어렵다.


우선 고구마줄기에 달린 잎은 모두 떼어내고, 깨끗한 물에 씻는다. 고구마줄기 끄트머리를 얇게 손톱으로 집듯이 잡아 쭉 벗기면 겉껍질이 도로록 말리며 벗겨진다. 그게 뭐가 어렵냐 싶을 수도 있지만, 한번 생각해 보시라. 본디 나물 반찬이라는 것이 나물거리 재료를 사 올 때에는 한아름이어도, 나중에 데치고 볶으면서 숨이 죽고 나면 완성된 반찬 양은 고작 한주먹이다. 고구마줄기도 온 가족이 두세 끼니 먹을 만큼은 만들어내려면 고구마줄기를 말 그대로 품에 가득가득 찰만큼은 사 와야 잎 떼고, 껍질 벗기고, 숨이 죽어도 그 양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고구마줄기 껍질을 벗기다 보면 즙이 묻어 나와 손톱과 손가락 끄트머리 살이 까맣게 착색되고는 한다. 착색된 부위는 손을 씻고 만져 보아도 풀물이 든 것처럼 피부 겉면이 약간 빡빡한 느낌이 든다.


껍질을 다 벗기고 나야 이제 본격적으로 끓는 물에 퐁당 넣어 데쳐내고, 찬물에 한소끔 식혀 물기를 꼭 짜준 뒤 기름에 달달 볶아가며 갖은양념을 넣고 간을 맞춰 반찬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어른의 시각에서 보면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쳐도 별다르게 특별한 맛도 나지 않는 나물 한 접시가 남는 것이니, 요즘 세상에서는 좀처럼 내 손으로 해먹을 마음을 먹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합법적(?)으로, 그것도 엄마와 할머니를 무려 '도와준다'는 칭찬까지 받아가며 손에 풀물이 들도록 풀떼기 껍질을 벗겨볼 수 있다니 그보다 더 수지타산 좋은 놀이가 어디 있을까.




몇 해 전 크테난테 아마그리스 한 포기를 선물 받았다. 은초록이라고 해야 할까, 묘한 바탕색 위로 잎맥의 무늬가 진한 녹색으로 선명히 새겨진 아주 우아한 식물이었다. 온실 속의 화초를 현실로 구현하면 이 아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운 아이가 순하기는 또 얼마나 순한지 모른다. 광량이 좀 부족해도 자태를 유지하고, 물 주기를 며칠 깜빡해도 끄떡도 안 한다. 그래도 물주기를 영 너무 까먹고 있으면 좀 삐지는지, 잎을 또르르르 말아버리며 항의의 뜻을 식집사에게 전해 온다. 그때도 늦지 않았다. 얼른 흙이 푹 젖을 정도로 물을 주면 2~3일 내에 화를 풀고 다시 어여쁜 얼굴을 내보인다. 개체수를 늘리기도 쉽다. 포기 나누기 형태로 번식을 하는데, 분촉 시켜 화분에 심으면 몇 달 만에 각자 화분을 가득 채울 정도로 새 잎을 끊임없이 내보인다.


아마그리스의 또 다른 매력은 잎의 뒷면이다. 겉면이 은초록 벨벳 같은 고아함을 뽐낸다면, 잎의 뒷면은 보라와 자주 사이 한 점의 색깔에 검은 물감을 개미 똥꾸멍만큼 톡 떨어뜨려 섞은 듯한 빛깔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색깔이냐면, 시장에서 파는 적고구마 줄기를 한 단 사 왔을 때 줄기에 달린 고구마 이파리 뒷면 색이라고 하면 누구나 한 번씩 봤음직한 그런 색깔이려나? 줄기 색은 보통 그보다 더 붉은기가 돌고, 잎사귀 뒷면의 색깔, 딱 그 정도의 보랏빛이다.


고아한 아마그리스, 내가 살짝 물을 말려버려서 잎이 말릴락 말락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마그리스를 보면 뜬금없이 고구마줄기 나물이 먹고 싶어진다. 언젠가는 아마그리스를 바라보며 골똘히 그 무(無) 맛의 줄기를 한참 생각하다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새벽배송으로 껍질 벗긴 고구마줄기를 한 봉지 구매해 보았다.


끓는 물에 십여분 데쳐서 마늘과 파를 쫑쫑 썰어 넣고 들기름에 달달 볶으며 약간의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해서 고구마줄기 나물을 만들어보았다. 특유의 아무 향취 없는 보드라운 나물 맛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에잇, 재미가 없었다. 역시 고구마줄기는 쪼그리고 앉아 TV 드라마를 틀어놓고 하염없이 도란도란 껍질을 벗기는 순간이 있어줘야 제 맛이다.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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