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라 이야기
현대인치고 망한 머리에 대한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망한 머리의 역사만 주욱 읊어도 3박 4일은 쉬지 않고 떠들 자신이 있다. 우선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망한 머리에 대해 논해보자면, 무려 약 35년 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 나이 다섯 살, 동생이 태어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몇 달 전까지 엄마 몰래 분유통을 열어 한 스푼씩 입에 털어 넣고 은밀한 달콤함을 만끽했었는데, 동생 녀석이 쑥쑥 자라더니 어느 날부터 집에서 분유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몰래몰래 털어먹던 그 맛이 아주 일품이었는데, 생각하며 입맛만 쩝쩝 다시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찬장 꼭대기 칸에 곱게 놓인 동그란 양철 분유통을 발견했다.
어린 마음에 생각하길, 내가 자꾸만 몰래 분유를 털어먹으니 엄마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올려 두었군, 싶었다. 그런다고 내가 저걸 못 먹을쏘냐. 나는 방에서 의자를 하나 끌고 나왔다. 찬장 앞에 의자를 두고 올라섰다. 의자 위에서 까치발을 디뎌도, 분유통은 워낙에 높은 곳에 있어 손가락 끝만 겨우 닿았다.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며 궁리했다. 분유통 바닥은 보통 끄트머리가 튀어나와 있고 가운데 부분은 오목하니 들어가 있으니, 손가락으로 끝부분을 톡톡 건드려 당기면 어느 순간 분유통이 기우뚱 떨어질 것이고, 그때 타이밍 잘 맞춰서 양손으로 떨어지는 분유통을 공중에서 탁 잡아내면, 달콤한 분유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톡, 톡, 톡... 계획대로 분유통 바닥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려가며 살살 당겼다. 그리고 드디어 기우뚱, 거기까진 순조로웠다. 그러나 인간사가 끝까지 계획대로만 흘러갈 리가 있나. 나는 떨어지는 분유통을 안정적으로 잡아내지 못했다. 떨어지던 통은 어쩌다 뚜껑이 열린 채 내 머리 위로 떨어졌고, 나는 머리에 내용물을 왕창 뒤집어썼다.
그 양철통은 실은 분유통이 아니라, 목공예를 즐기는 할아버지가 찬장 위에 올려둔 니스 통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머리에 니스를 뒤집어쓴 것이다.
"으아아악!"
대기를 가로지르는 나의 비명에, 방에서 아침 드라마에 빠져 있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실로 뛰쳐나왔다. 그분들은 내 꼴을 보고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바탕 난리가 나서, 할머니는 집안의 대야란 대야는 전부 끄집어내 찰랑찰랑 물을 받았고, 나는 엉엉 울면서 할아버지 품에 안겨 이 대야, 저 대야로 퐁당퐁당 담가지며 온몸을 씻고 또 씻어야 했다.
얼굴과 몸에 묻은 니스는 어떻게 닦아냈지만, 끝끝내 머리카락은 살리지 못했다. 다섯 살 평생을 곱게 길러온, 엉덩이까지 내려와 찰랑이던, 삼단 같이 고운 내 머리는 하루 아침에 몽땅 잘려나갔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숏커트를 치게 된다. 길 건너 챠밍 미장원 아줌마는 내 머리를 자르며 연신 낄낄 웃고 나를 놀렸다.
"오매오매, 벼리야. 아줌마는 아침에 자다가 니 우는 소리에 깨부럿지 뭐다냐. 할아버지, 살려주소! 동네가 아주 떠날아가불뻔 했당께. 온 아침에 니 땀시 잠 깬 사람 솔찮이 많을기다, 히히."
자고로 망한 머리는 복구가 어렵다. 그저 싹둑 잘라버리고 다시 기르는 수밖에.
식물도 머리를 망쳐 박박 밀어버려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깍지벌레나 응애 같은 병충해가 광범위하게 퍼져버렸다거나, 베란다에 화분을 방치해 냉해를 입어버렸거나, 너무 웃자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못난이가 되어버렸을 때 등등. 그런 때에는 별 수 없다. 본체가 상해버린 게 아닌 이상, 그냥 다 잘라내고 다시 예쁜 잎을 길러내는 수밖에.
우리 집 베란다에 놓인 파키라도 한때 머리를 박박 밀고 대머리가 된 적이 있다.
파키라는 본래 손바닥처럼 갈라진 잎이 풍성하게 자라는 예쁜 관엽식물이다. 창가 가득 드리운 파키라의 잎은 갈라진 잎맥마다 햇빛이 스며들어 연둣빛에서 짙은 초록으로 이어지는 그라데이션을 만들어낸다. 줄기 끝마다 새로운 잎들이 겹겹이 피어난다. 해외에서는 파키라 특유의 갈라진 이파리를 두고 돈이 열린다고 표현하여 Money Tree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파키라의 굵은 가지는 수분 저장력이 높아 평상시에는 물관리가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원산지가 남아메리카 따뜻한 동네여서 그런지 추위에 약하다. 생장 온도가 18~30℃라고 하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얼른 베란다에서 따뜻한 거실로 겨울나기를 위해 자리를 옮겨줘야 한다. 우리 집 파키라는 어느 해 아직 거실로 옮겨오기 전, 갑자기 이른 서리가 내리는 통에 심각한 냉해를 입어버렸다.
하루아침에 잎이 시들시들 축 쳐져버렸다. 아무리 잘 관리를 해보아도 파키라의 숱 많던 머리카락은 하나씩 하나씩 노랗게 시들어갔다. 시든 잎이 생기면, 그것이 아무리 소생 가능성이 없는 잎이라도 식물은 자꾸만 영양분을 시든 잎으로 보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억지로 살려보겠다고 미련을 떨기보다는, 어느 순간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는 것이 낫다. 나는 전지가위를 들고 싹둑싹둑 파키라의 모든 잎을 잘라냈다. 민둥민둥 대머리로 만들었다.
잎을 모두 잘라버린 뒤에는 잎을 통한 증산 작용이 거의 없으므로 물을 줄 때 주의해야 한다. 너무 자주 물을 주게 되면 뿌리가 썩어버리기 쉽다. 평상시보다 더 섬세하게 흙의 마름 정도를 확인하면서, 물 주기 간격을 늘려 겉흙이 충분히 말랐을 때 전체적으로 적셔질 정도로만 물을 주었다.
약 5~6주 가량 지나자 가지 끝에서 뭉툭한 새순이 하나씩 돋기 시작했다. 어찌나 반갑던지,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더라. 그리고 또 몇 주가 지나 새해가 되자 뭉툭했던 새순들에서는 갈라진 손바닥 모양의 작고 귀여운 연두 잎이 여러 장 돋아났다. 망한 머리 소생은 성공이었다.
작은 잎이 어서 커지라고, 나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자라나라 머리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