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덴드론 버킨 이야기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는 현관문 옆으로 광이 하나 있었다. 사시사철 쿰쿰한 지하실 냄새가 풍기는 그곳이 어린 나에게는 환상의 나라였다. 세상 신기하고 재미난 물건은 전부 그 광에서 나왔다. 보통은 시집간 고모들이 친정집에 남기고 간 것들이었는데, 귀퉁이가 깨진 앉은뱅이 책상, 불이 들어오지 않는 낡은 스탠드, 빛바랜 사진첩, 심오한 단어들로 가득한 일기장, 한참 철 지난 잡지책 따위의 것들이었다.
그날의 환상은 종이 끝이 노르스름하게 변색된 추리소설이었다. 셜록 홈즈였는지, 혹은 애거사 크리스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에피소드에 매력적인 여성인물이 등장했는데, 그녀는 무려 '엑조틱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엑조틱이라.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린 나는 한참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던 아날로그 세상이라, 영어 같기는 했지만 철자를 모르니 사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외국말을 할머니가 알 리가 없고, 엄마한테 물어보자니 광에 들어가 몰래 고모의 추리소설을 훔쳐다 봤다는 낮시간 동안의 행적을 이실직고해야 할 것 같아 고개를 젓게 되었다. 아, 이거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뜻이 있을 것만 같은데.
한참 시간이 흐르고, 교복을 입는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영단어장에서 엑조틱(exotic)과 조우했다. 이국적인, 이라는 뜻 앞에서 나는 허무하면서도 반가운, 양가적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진정 엑조틱한 식물을 하나 만나게 된다. 필로덴드론 버킨이다.
그곳은 희귀 식물들을 주로 판매한다는, 아주 크고 넓은 화원이었다. 바깥은 이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도 화원 안에 들어서니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 덥고 습했다. 그 안에서 스프링클러 미스트를 맞고 있는 널찍하고 화려한 이파리들은 그야말로 이국적이었다. 수십 년 전 낡은 추리소설 책에 타자체로 인쇄된 활자 모양 그대로의 '엑조틱'이 회상되었다.
필로덴드론 버킨에 성별이 있다면 '그녀'라는 단어 외에는 그녀를 지칭하기 어렵다는 느낌이다. 안개 미스트 틈에서 조용히 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지만, 강렬하다. 짙은 녹색의 치맛자락 위로 흘러내린 가느다란 달빛은 한 번 마주하면 좀처럼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엑조틱한 매력을 뽐낸다. 눈이 마주치자 고르고 흰 이가 드러나는 커다란 미소를 건네온다. 낯선 곳에서 더욱 빛나는 눈동자와 미소에서 어쩐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시작되는 것만 같다. 그녀는 은밀하면서도 아주 지독한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필로덴드론 버킨은 콩고나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필로덴드론 콩고로부터 파생된 줄무늬 품종이 필로덴드론 버킨이다. 윤기 나는 녹색 잎에 크림색의 핀스트라이프 무늬가 아주 선명하다. 이 세련된 무늬가 필로덴드론 버킨만의 정체성을 강렬하게 형성한다. 어디에 놓아도 존재감이 아주 뚜렷하다. 게다가 필로덴드론 종류는 덩굴성 식물일 때가 많은데, 이 아이는 직립형으로 자라난다. 덕택에 덩굴성 식물보다 깔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만, 충분한 일조량을 보장하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포기가 계속 생성되며 풍성한 잎을 뽐낼 수 있다. 잘못해서 잎이 부족한 채 웃자라면 특유의 아름다움을 영 잃어버리게 된다.
필로덴드론 버킨은 꽃에 암수가 함께 있어 특별히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식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내에서 꽃을 피워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 보통은 포기나누기로 개체수를 늘린다. 그리고 옥살산칼슘이라는 성분의 독성을 품고 있어, 섭취 시 입과 위장 장애를 가져올 수 있고 수액이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자극을 일으킬 수 있으니 어린 아이나 반려동물이 있는 가정에서는 주의를 요한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감춘 비밀은 가슴에 품고 있는 독이었나 보다.
뜬구름 잡는 한낮의 몽상이 필요할 때면 필로덴드론 버킨의 줄무늬 잎을 가만히 바라본다. 응시하는 시선의 초점이 사라지면서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나는 잃어버린 미지의 세계, 환상의 나라를 다시 찾는다. 달큰한 습기가 얕게 흩뿌려져 있고, 아무리 뒤져도 매번 새로운 신기루를 토해주던, 그 컴컴한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온갖 우스꽝스러운 흔적을 뒤져가며 오늘의 이야기를 찾는다.
먼 훗날, 내가 정말로 늙어버린 뒤에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조바심 나도록, 알 수 없어 오로지 흥미롭기만 했던, 유년의 그 빛나는 어둠을 말이다.
*알림*
다음 화부터 <식집사일지>는 토, 일 주2회 연재 예정입니다. 소중한 독자님들께서 눌러주시는 구독과 라이킷은, 식집사를 춤추게 하는 좋은 비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