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육이 이야기
가끔 보면 다육이에 푹 빠진 사람들이 있다. 종류별로 구색 좀 갖췄다 하면 집에 다육화분만 수십 개는 기본이고, 개체 수 좀 늘려봤다 하면 화분이 수백 개에 이르는 것이 우습다고들 하더라. 듣기만 했을 땐, 아무렴 얼마나 욕심껏 개체수를 늘리면 화분이 수백 개가 되나 싶었다.
몇 년 전에 어쩌다 주인 잃은 다육화분 서너 개를 임시보호하면서 처음으로 다육식물을 키우게 되었다. 직접 가꿔보니 인정이다. 다육식물을 키우며 끊임없이 화분을 늘리지 않으려면 인정머리 없이 냉정해야 한다. 무엇에? 떨어진 잎에.
내 취향은 아니다. 풀떼기를 무성하게 키워내는 일에 몰두하는 나로서는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무언가가, 게다가 그 통통한 잎 - 그렇게 두꺼운 것들을 잎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조차 의문일 때가 더러 있는- 들이 어느 포인트에서 예쁘고 귀엽다는지 도통 공감할 수가 없었다. 일전에 호야를 소개하면서 한 번 밝힌 바 있듯, 주관적인 미적 기준에 의하면 다육성 이파리는 기꺼이 키우고 싶을 만큼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에게 다육이의 이미지는 생긴 것이 괴팍하고, 유연하지 못하게 딱딱하고 고집스러운, 어쩔 수 없는 못난이 같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육이를 주워오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몇 년 전 회사에서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하였다. 한 번에 싹 내보내고 뚝딱뚝딱 고친 것은 아니고, 이를테면 1번 사무실에 근무하던 사람들을 임시 공간으로 내보내고 고친다. 1번 사무실이 수리된 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면 이번에는 2번 사무실에 근무하던 사람들을 임시 공간으로 보내고 고치는 방식으로 공사가 순차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꽤 긴 기간 동안 드문드문 사람들과 짐이 모두 빠져나간 휑뎅그레한 공간들이 생겨났다.
이삿짐이 빠져나간 빈 사무실 창틀에서는 종종 버려진 다육이들이 발견되었다. 언제부터 창틀에 자리를 잡고 햇볕을 먹고 자랐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그냥 거기 있던 그런 존재. 누가 가져다 두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말라갈 만하면 누군가 먹다 남은 물을 부어줬겠지. 그렇지만 임시 공간으로 향할 이삿짐을 싸면서까지 다육이까지 챙겨간 직원은 아무도 없었던 게다. 오며가며 가만히 지켜봤지만 아무도 녀석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녀석은 철거될 사무실에 홀로 남은 처량한 다육이. 주인 없는 다육이. 버려진 녀석이었다.
매 계절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읊자면 봄을 타고, 여름을 타고, 가을을 타서 물색없이 센티해질 때마다 남겨지고 버려진 다육 화분들이 눈에 띄었다. 그 아이들이 곧 폐기물 봉투에 철거 잔해와 함께 버려질 예정임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둔다면… 글쎄, 식집사에게는 윤리와 명예의 문제가 아닐까. 저 짠한 것이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을지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데, 어떻게 그냥 그렇게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냔 말이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주워와서 지금껏 끝나지 않는 임시보호 중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이건 절대 내가 원해서 키우고 뭐 그런 것이 아니다. 미리 말했듯, 내 스타일은 아니라니깐.
어휴 못난이들. 못생겨서 그런지 아무도 데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뭐. 볕 좋은 남쪽 창가에 올려둔 채 내가 물 주고 이렇게 키우는, 아니 임시로 계속 보호하는 수밖에.
다육식물은 보통 건조한 기후에서 서식한다. 물이 주어졌을 때 양껏 저장해 놓아야 이어지는 건조한 날들에 버틸 수 있다. 그래서 다육이들은 잎이나 줄기에 수분을 잔뜩 머금어 두꺼운 층을 생성하고 있다. 다육의 한자어는 多肉, 말 그대로 살이 통통하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다육은 종속과문강문계의 계통에 속하는 용어가 아니다. 그냥 잎이나 줄기, 때로 뿌리에 두텁게 물을 저장해놓는 식물을 통칭하는 말일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다육이의 통통한 잎은 동물로 치면 낙타의 혹 같은 것이다. 사막의 기후를 견디기 위해, 먹을 수 있을 때 등이 불룩 솟아오르도록 잔뜩 저장해 둔 양분. 그렇게 치면 못생긴 통통한 잎은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세상에서 내일도 살아남기 위한 아등바등함이었다고나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내일을 담보하지 못한 다육이가 양분을 가득 머금고 있을 때면, 작은 힘만 가해져도 잎이 똑 떨어져 버리기 쉽다. 줄기와 잎의 연결부위가 오통통 살 오른 팔뚝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흙먼지를 떼어주려고 살살 건드리는 정도에도 툭 잎을 떨군다.
처음에는 별로 세게 건드린 것도 아닌데 통통한 잎이 떨어지니, 살짝 약이 올랐다. 잡아 뜯어도 안 떨어질 것처럼 우락부락하면서, 생긴 거랑 다르게 왜 이렇게 연약해? 진짜 어이가 없네? 떨어진 잎이 멀쩡한 초록이다보니 쓰레기통으로 향하긴 좀 아깝다. 그래서 대충 흙에 툭 꽂아놓으면 거기서 또 뿌리가 나고 새 가지와 잎을 틔워 올리며 튼실한 다육이 하나가 추가로 생겨나는 것이다. 떨굼 또한 생존의 확장이다. 이렇게 번식이 쉬우니 다육이 화분이 수백 개가 될 수도 있구나,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달성(?) 가능한 상황었군 싶다. 어쨌든 살아있는 것이라면, 저 조그만 다육이까지도 존재를 영속시키고 싶은 욕망은 이토록이나 강렬하다.
세상 그 누구라도, 살아간다는 것은 때때로 참 안쓰러운 일이다. 삶을 살아내기가 늘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일 수만은 없으니까. 악다구니를 쓰며 매일 각자의 오늘을 버텨내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연악한 존재들이다.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 털썩 쓰러지기 쉽다. 나도 그렇다. 줄줄이 서있는 못난이 다육이들에게서 문득문득 내 그림자가 보인다.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림자와 닮아보여, 그렇게도 괜히 더 안 예뻤는지도 모르겠다.
내일이나 모레는 너무 급하고, 이레에서 열흘 쯤 지나 집이 바싹 마르면 또 물을 줄게. 그리고 지금처럼 햇빛 가득한 창가에서 따뜻하게 보살펴 줄게. 너나 나나 내일이 오늘보다 살만할거라고 생각하자. 이번 주말엔 툭 힘 빼고 편히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