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은 아마 있을 거야

스타티스 이야기

by 정벼리

사춘기의 문턱을 넘을락 말락 하는 딸아이는 한동안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철학책을 잔뜩 빌려다 뒤적거리더니, 어느 날인가 서점에 가서 최대한 두꺼운 철학책을 사고 싶단다. 왜 하필이면 두꺼운 책이어야 하는지 묻자, 아이는 일종의 지적 허영심을 감추지 못한 채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꺼운 철학책 곳곳에 인덱스 스티커를 붙여가며, 형광펜으로 줄도 긋고 메모도 남겨보고 싶다고. 말하자면 제 딴에 생각한 '철학 연구에 심취한 자'의 이미지를 현실로 구현해보고 싶다는 게지. 그런 허영심쯤은 백번이라도 채워주고 싶어, 그날로 곧장 서점에 데려가 되도록 쉬운 말로 쓰인 철학, 인문학, 세계사 책을 네 권이나 품에 안겨주었다.


그다음 날인가, 아이는 새로 사 온 책을 읽다가 부엌으로 뛰쳐 들어오더니 이마에 제법 심각한 주름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


"엄마, 나는 공리주의가 정말 싫어! 다 같은 사람인데 다수의 의견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잖아. 자기도 언제든 소수가 될 수 있는데 그런 건 생각 못 하고 말이야. 사람은 모두 평등한데 차별하는 것 같아!"


아이의 주장에 공정하고 옳은 부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른바 'NT 성향'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반론을 펼쳤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현실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어쩔 수 없는 차악이자 때로는 차선의 지위까지 차지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아이는 자원을 나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며 받아쳤다. 모녀의 설전은 정의와 평등, 공정, 윤리, 도덕을 넘나들며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벌써 몇 달 전 이야기다. 아이는 며칠간 열심히 인덱스를 붙여가며 독서에 심취하더니, 어느새 관심사가 평행우주와 과학 이야기로 옮겨가 버렸다. 미처 다 읽지 못한 철학책들은 나란히 책장에 꽂혀 언젠가 아이가 다시 저를 돌아봐 주길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이가 책을 다 읽고 나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기에, 나에겐 제법 아쉬운 일이다. 묻고 싶었던 것은 별것이면서도 별것은 아닌, 바로 '영원한 것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철학사에서 영원에 대한 논쟁은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토대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찍이 파르메니데스는 형이상학을 창시하며 존재론을 부르짖었고, 플라톤은 제아무리 현실이 변하고 썩어 없어질지언정 완벽한 이상만큼은 영원불멸하다며 인류에게 '이데아'의 세계를 소개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서양 철학사에서 영원한 진리에 대한 숱한 탐구의 계보를 낳았고, 중세에 이르러 그 영원성은 '신'과 '종교'로 이어졌다.


근대에 들어서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며 형이상학적 영원성이 부정된 이래로, 과학의 폭발적 발전과 함께 이제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일종의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영원을 논하면 어딘가 조금 촌스러운 사람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니 말이다. 어느 술자리에서 공대 출신 후배 하나는 혀 꼬인 말투로 나를 비웃었다.


"영원한 게 어딨어요. 선배님, 열역학 제2법칙 모르쉐요?"


나는 숟가락을 치켜들고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나는 문과라 그런 거 모른다, 이놈아!"


신은 죽었고 모든 인간이 주체성을 되찾은 지 오래건만, 나는 타율에 젖어버린 탓인지 혹은 정말 열역학 제2법칙을 몰라서 그런지 여전히 영원을 믿고 싶다. 세상이 백만 번 뒤집히더라도 변치 않는 불멸의 정의는 존재할 것이며, 사랑과 선의는 여전히 아름다운 가치로 칭송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련된 세상이 이런저런 '엔트로피'를 들이밀며 촌스러운 나의 가치를 위협할 때면, 나는 성당에 가서 마음의 위안을 얻곤 한다. 투박한 폰트로 인쇄된 성경과 찬송가를 뒤적이며 오래된 의식에 참례할 때, 태초의 신성과 고결한 가치들을 마주하며 일종의 평정심을 찾는달까.


영원은 아마 있을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꽃병에 꽂힌 꽃처럼 덧없는 것이 어디 있겠냐만, 거기서도 영원을 논해볼 만한 것이 있다. 종이꽃 질감으로 유명한 스타티스다. 스타티스는 화원에서 한껏 싱싱한 상태로 마주할 때조차 바스락거리는 종이 같은 꽃잎을 자랑한다. 이 꽃은 꽃병 안에서 가장 늦게까지 제 색을 지켜낸다. 물이 다 마르고 다른 꽃들이 고개를 숙여 떠나가도, 스타티스만은 처음 만난 날의 보라색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나를 바라본다. 진짜 중요한 건 변하지 않는 거라고 나직이 속삭이는 것만 같다.


꽃말마저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마음'이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에는 멀리 떠나는 사람에게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의미로 스타티스를 건네곤 했다.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꽃처럼, 함께한 추억도 바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수분이 거의 없는 독특한 질감 덕분에 스타티스는 생화일 때의 선명한 색과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며 마른다. 잘 말린 스타티스는 1~2년은 생화 못지않은 선명한 색감을 뽐내고, 습도 조절만 잘 된다면 그 형태는 거의 영구적으로 보존 가능하다.


자고 나면 휙휙 바뀌는 세상이다.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인데, 어쩐지 세상의 시간은 갈수록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은 참 외롭다. 모든 것이 덧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영원은 아마 있을 거라고 믿어보련다.


하찮은 꽃잎 하나조차 시간이 멈춘 듯 제 빛깔을 지켜낼 줄 아는데, 하물며 인간의 영혼에 깃든 고귀한 진심들이 영원하지 못할 리가. 내 마음속 촌스럽고 단단한 이데아 하나쯤은 끝까지 지켜내 보자. 영원은 아마 있을 것이다. 아니, 당신과 내가 믿기로 한 그 순간 이미 영원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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