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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책 서점에서

서로에게 조심스레 건네는 인생의 딱 한 권.

by 정벼리

오늘까지 쓸 수 있는 포인트가 아직도 3만 원이나 남았다. 오늘이 지나면 사라진다. 사건의 발단은 일 년 전 오늘이다. 가족끼리 중고책을 파는 서점에 들렀는데, 만 원 상당의 에코백을 구입하면 포인트를 6만 원 지급하는 이벤트가 진행 중이니 참여해 보라는 직원의 권유에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덜컥 응해버렸었다. 일 년 동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했던 포인트는 알고 보니 구매 금액의 30% 한도 내에서 사용 가능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해당 지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을 뿐 타 지점이나 인터넷 구매 시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가끔 이렇게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 덜컥 뭔가 구매해 버릴 때가 있다. 고치려고 노력하는데 쉽지는 않다. 포인트를 잔뜩 준다는 말에 귀가 팔랑거려 구매한 에코백은, 털어놓기 부끄럽지만 솔직히 사놓고 일 년이 다 되도록 한 번도 꺼내 들어본 적이 없다. 디자인부터가 내 취향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다 쓰지도 못할 포인트에 눈이 멀어 이걸 왜 샀을까 싶지만, 이미 지난 일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더 덜 아까운 방향으로 승화시키는 수밖에.


받아놓고 쓰지 못한 포인트를 어떻게든 소진해 보려고, 오늘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중고책 서점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요새 책 값이 비싸다고는 하지만, 중고책 서점이라 정가에서 꽤나 할인되어 판매되기 때문에 남은 포인트를 혼자서 다 소진한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함께 점심을 먹는 직장 동료들을 살살 꼬드겼다.


" H 씨와 S 씨는 책 좋아해요?"




H와 S는 지난 3년 간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면서 꽤나 가깝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직도 많더라. 알고 보니 우리는 모두 소설책을 즐겨 읽었고, 특별한 목적 없이 서점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구매금액의 30%를 내 포인트로 충당해 줄 테니 중고책 서점에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에 모두 함께 길을 나섰다.


우리 사이에 이런 공통점이 있는 줄 몰랐다며 수다를 떨고 깔깔 웃기도 하며 신나게 걸어 왔건만,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는 급격히 어색해졌다. 지금껏 함께 해본 적 없는 경험을 처음 함께 하는 것은 이처럼 다 큰 어른들도 뚝딱거리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느라 한참동안 적극적으로 책을 고르지 못한 채 자꾸 눈치를 살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였다. 셋 중 하나가 용기있게 말했다. 각자 책을 고르고 다시 만나자고.


한참을 국내 소설과 새로 들어온 책 코너 앞에서 서성거리며 한 권, 두 권 책을 고르는 나에게 H가 불쑥 다가와 말했다.


"혹시 이 책 읽어보셨나요?"
"아니요. 안 읽어본 책이에요."
"그럼 이거 한 번 읽어보시는 것 어때요? 취향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제 인생의 딱 한 권을 고르라면 바로 이 책이거든요."


H의 인생 책 추천과 함께 우리 사이를 맴돌던 뚝딱임은 일거에 사라져버렸다. S와 나는 H의 인생 책을 기꺼이 받아들었고, 각자 자신의 인생 책을 서가에서 찾아 서로의 품에 안겼다. 우리 사이에는 최은영의 「밝은 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놓였다. 언제 어색했냐는 듯 다시 재잘재잘 떠들며 몇 권씩을 더 골랐다. 품에 책 꾸러미 한 아름씩을 안아들고 우리는 씩씩하게 서점을 나섰다. 더위가 훅 끼쳐왔다. 이렇게 잔뜩 살 줄 알았다면 차를 가져올 걸 그랬다고 투덜투덜, 나란히 걸었다.


친해지기 딱 좋은, 묵직한 여름 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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