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ella Oct 30. 2022

탑승권 속 보물찾기: 여행의 가치(1)

 


  2013년 7월,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교무실로 한 장의 엽서가 날아들었다. 인터라켄에서 엽서를 보낼 만한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발신인을 확인한 순간 반가운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엽서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며 점점 벅차오르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날 수업에 그 엽서를 들고 들어갔다.


  선생님 덕분에 이 여행을 가게 됐고,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장소에서 선생님이 생각나 편지를 쓰고 있는데 참 좋다는 내용의 엽서를 보며, 특히 그날은 사랑하는 내 제자의 삶에 미약하지만 내가 선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확신이 들어 교사 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엽서를 들고 들어갔던 그 수업에서도 바쁜 수업의 일부를 굳이 쪼개어 ‘삶에서 여행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 힘주어 말하고, 꼭 단 한 번이라도 ‘진짜 여행’을 떠나보라는 추천을 했다.  


  돌아보면 나는 국어 수업을 기획하며 종종 수업에 ‘여행’을 접목해, 직접적인 수업 목표와 별개로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진짜 여행을 떠나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늘 꿈꿔왔다. 작문 수업에서 ‘배낭여행 상상 기행문 쓰기’를 수행평가로 진행했던 것에도, 문법 수업에서 훈민정음을 다룰 때 ‘런던 영국 박물관 한국관’에서 봤던 관련 자료를 제시했던 것에도, 문학 수업에서 문정희 시인의 시 ‘자화상 부근’을 제재로 수업을 진행할 때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꺼냈던 것에도 모두 국어 수업의 목표 달성과 더불어 앞으로 마주할 아이들의 삶에 여행이 깃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여행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든다는 것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여행을 떠날 것을 추천하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여행 그거 꼭 가야 하나? 잠깐 갔다가 돌아오는 건데 그게 삶에서 중요한가? 이해한다. 첫 번째 자유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나도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기회가 된다면 배낭여행 꼭 가봐.
그 여행이 분명 삶의 시야를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줄 거고
때때로 여행은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


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줬던 지인의 말에 


‘재미는 있을 수 있겠지만 무슨 짧은 한 달의 여행이 20년 넘게 살아온 인생을 바꿀 수 있겠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이렇게 생각했던 나였다. 


그런데, 첫 번째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지인의 말에 200% 동의하게 되었고, 지금은 어쩌면 지인의 말보다도 더욱 크고 강한 확신으로 여행의 가치를 역설(力說)하고 있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크게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행의 매력을 아는 많은 여행자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선에서 짐을 싸거나, 짐을 쌀 꿈을 꾸거나, 하다못해 랜선으로라도 여행을 한다.


BOARDING PASS(탑승권)에서 발견한 여행의 가치



  ‘세계 여행’을 테마로 기획했던 2017년 학교 축제에서 화제가 됐었던 탑승권을 짐 정리를 하다 발견했다. 당시 학생회 학생들이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축제 참여 기념 티켓으로 탑승권을 제작하여 한 장씩 배부를 했었는데, 모두 그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책상에 놓인 항공권 티켓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나는 듯한 설렘을 느꼈었다.


  탑승권에는 보통 여행자의 ‘이름(NAME)’, ‘출발지(FROM)’, ‘도착지(TO)’, ‘날짜(DATE)’, ‘편명(FLIGHT)’ 등이 나와 있는데, 이 탑승권을 구성하는 요소들에서 우리는 여행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① 이름(NAME): 여행의 주체어쩌면 모든 여행의 출발지이자 도착지

     

  탑승권의 맨 위에는 항상 ‘이름’이 적혀 있다. 우리가 항공편을 예약할 때 영문명 한 글자라도 틀리면 안 된다고 여러 번 확인하는 그 이름. 바로 ‘나’. 그렇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여행의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통해 수많은 장소를 오고 가지만, 어쩌면 결국 모든 여행의 출발지이자 도착지는 바로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 내내 가장 많이 자문했던 질문은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였는데, 내가 내린 잠정적 정의는 ‘여행은 나답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나다움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익숙한 상황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은 친숙하고 편안하지만, 그래서 진짜 ‘나다움’에 대해 생각할 이유도 ‘나다움’을 발견할 계기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일단 일상을 떠나 낯선 곳으로 한 발을 딛는 순간 일상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진짜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행은 늘 크고 작은 문제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는데, 그 상황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자아는 성장한다. 


  평소 일상에서의 나는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며 때때로 잔걱정이 많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대학생 때 유럽으로 첫 배낭여행을 떠나기 전 정말 오만 가지 걱정으로 내가 과연 출발이나 할 수 있을까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떠나보니 눈 감았다 뜨면 새로운 나라에 도착해 있는 야간열차의 매력에 흠뻑 빠질 정도로 나는 타고난 여행 체질이었고, 한 달 동안 각종 사건사고로 ‘병원, 경찰서, 대사관’ 3종 세트를 모두 방문할 만큼 정말 스펙터클했던 여행이었는데 그 속에서 나는 때로는 놀랄 만큼 침착하고 생각보다 용감한 숨은 내 자아를 발견했다. 고생스러운 날도 많았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의 집합체였던 그 여행에서 나는 삶의 용기와 지혜를 몸소 체득했고,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인생 여행이라고 주저 없이 손꼽을 만큼 나는 그 여행이 정말 좋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기회가 될 때마다 나는 ‘여행을 통한 배움길’에 올랐고, 그 연장선에서 싱가포르와 유럽, 이 두 번의 교육기행도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알베르 카뮈’에 따르면, 쾌락은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지만, 여행은 ‘스스로에게 자신을 다시 끌고 가는 하나의 고행’이다. 그렇다. 여행은 자신의 참자아와 제대로 직면하며 ‘나’에서 출발하여 결국 ‘나’로 다시 돌아가는 삶의 특별한 시간이다.

     

 ② 출발지(FROM)와 도착지(TO): 떠남과 머무름그리고 돌아옴의 미학     


  탑승권의 이름 아래에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기재되어 있다. 이는 곧 여행자가 일상에서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할 것임을 명시적으로 알려주는 표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만약 이 떠남이 ‘여행’의 일부라면, 비록 탑승권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떠남’에는 반드시 일상으로의 ‘돌아옴’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덕분에 우리는 낯선 곳으로 떠나면서도 마냥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여행지에서도 현지인처럼 변화된 생활에 애써 적응하고 정착하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여행자로서 계획한 대로 또는 아무 계획이 없어도 좋다.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잘 여행지에 머무르다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안정적 낯섦’이 주는 ‘설렘’과 정해지지 않은 ‘자유로움’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진정한 묘미이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것은 일상에서 낯섦을 찾아 떠나온 여행자들이 잠시 머무르는 여행지에서 단지 이방인으로서만 그 여행지를 탐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낯선 곳에서의 머무름에 일상이 침투해서 여행과 일상을 동시에 누리며, 이방인이자 ‘반짝 현지인’으로 여행지에 머무를 때 그 여행지는 진정한 매력을 보여준다.


  유럽에는 성당이 참 많다. 예전에 유럽을 찾았을 때는 그냥 여느 관광지처럼 성당을 둘러보기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각 나라의 문화 체험 및 신앙생활의 일환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미사’를 드렸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쾰른 대성당, 베를린 대성당(참고로 베를린 대성당은 이름과 달리 ‘가톨릭’의 성당이 아니라, ‘개신교(루터교)’ 교회이다. 나는 가톨릭 성당이라 생각하고 미사를 드렸는데, 미사가 끝난 후 옆에 앉았던 외국인 커플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새로운 정보였다.)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기본 예식은 비슷하면서도 각 나라마다 특색이 있는 미사의 모습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님으로 찾아온 여행지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잠시 주인이 되어 그들과 함께 신성한 한 시간을 오롯이 채울 수 있었던 그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떠남’을 뜻하는 영단어에는 ‘depart’가 있고, ‘머무름’을 뜻하는 영단어에는 ‘remain’이 있다. 그리고 ‘돌아옴’을 뜻하는 영단어로 ‘return’을 들 수 있다. 어원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겠지만 각 단어에 들어가 있는 ‘part’와 ‘main’ 그리고 ‘turn’에 자꾸만 눈이 간다. 어쩌면 일상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이 잠시 뒤에서 머물며 삶의 ‘중심’을 찾아 본디의 자리로 ‘돌아서는’ 것이 진짜 여행이지 않을까?    

  

 ③ 날짜(DATE):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출발지와 도착지만큼 탑승권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날짜’이다. 일상에서도 때때로 날짜와 시간이 중요하지만,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떤 때는 그날이 그날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훌쩍 지나간 일주일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여행지에서의 날짜와 시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정된 시간 동안 여행지에서 머무르다 정해진 날짜가 되면 우리는 또 다른 여행지로 이동하기에 여행지에서의 1분 1초는 특히 더 소중하다.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기에 어쩌면 여행자에게 여행지의 물리적 시간은 애초에 일상과는 다른 단위의 속도로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은 때로는 일상보다 느리게, 또 때로는 일상보다 빠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삶의 진리를 그 어느 때보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같은 여행지를 시간이 지나 두 번 이상 방문했을 때 더욱 명확하게 느껴진다. 동일한 장소를 다시 갈 때면 예전에 여행지에서 느꼈던 그 느낌을 상상하며 찾아가지만, 막상 가보면 그 여행지의 느낌은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행지도 여행자도 여러 가지로 변화를 겪었을 것이고, 그 변화된 장소와 주체가 서로에게 스며들며 새로운 관계를 빚어내는 것이 곧 여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추억의 또 다른 나쁜 점은 그저 똑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날 거라고 애써 생각할 때 생겨나. 한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단다. 강물이 결코 두 번 다시 같은 곳에서 흐를 수 없는 것처럼 인생에서의 여러 상황도 똑같이 되풀이되지는 않아. 하지만 많은 사람이 똑같은 경험에 안도감을 느끼려고 하다가 덫에 빠지곤 하지. 과거의 추억에만 얽매이면 현재의 새로운 경험을 제대로 즐기고 누리지 못해.


  A.G. 로엠메르스의 『어린왕자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추억’이 삶에서 지니는 힘을 믿지만, 그것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면 ‘과거’에 머무르며 ‘현재’를 생생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추억의 부작용’에도 동의한다. 그래서 예전에 여행할 때는 일상으로 돌아간 후의 추억을 위해 사진이나 글로의 기록에 집중했다면, 요즘은 가끔 여행지에서의 순간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몸의 세포를 여행지의 공기에 맡길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이렇게 오롯이 내 전부를 여행지에 맡겼을 때, 사진이나 글로 남기지 않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아주 가끔 4D 영화처럼 내 세포가 그때 그 공기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02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