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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Oct 30. 2022

탑승권 속 보물찾기: 여행의 가치(2)

탑승권 속 보물찾기: 여행의 가치(1)

④ 편명(FLIGHT): 장소와 장소의 연결 고리이자 움직이는 여행지

     

  ‘편명’은 출발지에서 또 다른 도착지로 이동할 때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의 세부 정보이다. 여행자들은 비행기, 기차, 지하철, 버스, 트램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 이것들은 여행자들이 장소를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이자 곧 ‘움직이는 여행지’이다. 교통수단 자체를 목적지로 잡고 여행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 여행을 할 때면 교통수단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법 많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거나 예상하지 못한 우연과 마주하며 재미있는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베르니나(Bernina)’는 한 달 남짓의 여행 중 어느 하루의 목적지였다. 우리가 신중하게 여러 번 고민한 끝에 선택한 이곳은 나라 이름도 도시 이름도 아닌, 바로 ‘스위스 특급 열차’의 이름이다.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이동하는 동선을 고민하던 중 우리는 어느 하루의 이동 경로를 ‘밀라노-티라노-쿠어-취리히’로 잡고 온종일 기차를 타보기로 결심했다. 많은 여행자들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이동 경로를 최소화하여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선택하는데, 우리는 이례적으로 그날 하루 종일 ‘이동’만 하는 것을 택했다. 어찌 보면 상당히 비효율적인 판단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베르니나(Bernina) 특급 열차’ 그 자체가 지닌 매력 때문이었다. 


  스위스에는 우리가 탔던 ‘베르니나’를 제외하고도 ‘빙하 특급’, ‘골든 패스’, ‘빌헬름텔’과 같은 다양한 열차들이 많다. 기차 안에서 지나가는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여행하는 것을 특히나 좋아하는 나는 막판까지 어느 열차를 탈지 고심하다가 우리의 큰 이동 경로 안에 있으면서 무엇보다 ‘빨간 통유리 열차’가 정말 매력적이었던 ‘베르니나’를 택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매우 탁월했다. 비 오는 날 창밖으로 지나가는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풍광을 눈에 담으며 열차로 국경을 넘는 경험은 편안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고, 무엇보다 우리와 간간이 대화를 나눴던 옆 좌석의 노부부는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모습인지 우리에게 표본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를 그 노부부가 살고 있는 암스테르담 근교의 ‘하를렘(Haarlem)’으로 정했다. 사실 그 열차를 타기 전까지 나는 미국의 할렘가는 들어봤어도 네덜란드에 하를렘이라는 도시가 있는지 알지 못했고(나중에 검색을 해보니 미국의 할렘은 식민지 개척 초기에 뉴욕에 자리 잡고 있던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네덜란드 도시 하를렘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랬기에 당연히 하를렘에 갈 계획은 전혀 없었는데 이렇게 우리의 여행 계획은 즉석에서 수정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여행을 마무리할 시점에서 매우 재미있으면서도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자세한 에피소드는 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소설가 구보가 하루 동안 서울 거리를 배회하며 느꼈던 것들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몇 년 전 이 작품을 수업했었는데, 주인공이 ‘전차’ 안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섬세하게 잘 드러낸 부분이 교과서에 제시문으로 나와 있었다.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교통수단 하나를 골라 30분 이상 탑승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메모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창작하는 소설 패러디 수행평가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학생들이 기대 이상으로 수행평가에 즐겁게 임했고 결과물에도 학생들의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 삶의 소소한 재미가 많이 녹아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교통수단의 본연의 기능은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는 것이지만, 그곳은 수많은 자아가 역동적으로 만나는 또 다른 작은 세상이기도 하기에 때로는 여행의 과정이 되고 때로는 여행의 목적이 된다.

     

 ⑤ 주의사항: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 하지만 못 지켜도 여행은 계속된다. 

    

  탑승권 하단에는 작지만 진한 글씨로 ‘항공기 출발 40분 전에 탑승구에 도착하여 주십시오.’와 같은 주의사항이 적혀 있다. 비행기나 열차가 연착되지 않는 한 여행지에서의 교통수단은 우리의 개인 사정을 기다려주지 않기에, 이러한 주의사항을 지키는 것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여행을 망치지 않기 위해 꼭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약속이다. 하지만 여행자들은 의도치 않게 때때로 이 주의사항을 놓칠 때가 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설령 주의사항을 지키지 못했을 때도 여행은 너그러이 우리에게 또 다른 방향에서 계속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그린델발트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현지인이 강력 추천한 취리히의 쿤스트하우스(Kunsthaus. 자코메티, 샤갈 등 세계적인 명작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취리히 미술관)의 매력에 흠뻑 빠져 너무 오랫동안 취리히를 떠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베른으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하는 플랫폼을 겨우 찾아 그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지만 1분도 안 되는 시간 차이로 우리는 눈앞에서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음 열차 스케줄을 찾았는데 어라 1시간 후 출발이네. 다음 열차가 있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문제는 베른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그린델발트’는 우리나라로 치면 설악산 중턱이라고 해야 할까? 베른에서 환승을 해서 인터라켄 동역을 거쳐 산악 열차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우리의 숙소가 있는 그린델발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플에 들어가 열심히 열차 시간을 계산해보니 조금 빠듯할 수도 있겠다 싶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인터라켄 동역에서 22시 05분에 출발하는 마지막 산악열차를 타면 도착이 가능했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의 주인분들이 역으로 픽업도 나와주시기로 약속도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곧 마음을 놓았다. 


  베른에서 환승도 잘했고 인터라켄 동역을 향해 문제없이 잘 가고 있었는데, 도착할 시간쯤 방송이 나오며 열차 안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느낌상 분명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낯선 외국어로 나오는 방송을 정확히 듣지 못한 우리는 옆에 앉은 승객과 대화를 했고 이 열차가 지금 ‘연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휴대폰의 시간을 보니 인터라켄 동역에 22시 05분에 도착하는 건 이미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래도 마지막 열차고 이것은 개인의 실수가 아니니 이 지연 상황에서 그린델발트행 산악 열차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인터라켄 동역에서 텅 비어 있는 그린델발트행 열차 플랫폼을 보며 곧 무너지고 말았다.


  속된 말로 멘붕이었다.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마지막 열차는 떠나버렸고, 산 중턱의 숙소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원래 약속한 시간에 이미 그린델발트역으로 우리를 데리러 나오셨다 허탕을 치신 숙소 주인 부부는 화가 나신 듯했고 축제 때문에 마을 길을 통제해서 설사 우리가 그린델발트에 도착한다고 해도 더이상 픽업을 나와주실 수 없다고 하셨다. 축제라서 길을 통제한다고? 자정을 향해 가는 이 시간에?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주고받은 메일을 정신을 차리고 읽어보니 다음 날인 8월 1일이 ‘스위스 국경일’이었다. 그리고 메일 끝에 역에서 제법 떨어진 숙소까지 걸어가는 방법과 함께 마지막으로

     

  Maybe enjoy the fireworks at midnight on your way to the hotel?
It could be great!        


라고 쓰여 있는 걸 보며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길바닥에서 맞는 자정의 불꽃놀이라……. 자정에 내가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서는 비뚤어진 마음에 이거 빈정대는 어투인 건가?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결과적으로는 다행히도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마지막 버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는 그 버스를 타고 그린델발트역에 무사히 내렸다. 숙소 주인분이 말씀해주신 대로 그린델발트역부터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은 축제 인파로 가득했고, 우리는 “Excuse me!”를 무한 반복하며 짐을 끌고 열광의 도가니를 헤치며 숙소를 향해 걸었다.


  인파를 헤치고 또 헤치며 복잡한 곳을 어느 정도 통과해 캄캄한 길을 일행과 단둘이 걷고 있는데, 펑! 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극도로 떨어진 체력에 인적이 드문 밤길이라 그리 낭만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치 우리의 그린델발트 무사 입성을 축하하는 우리만을 위한 불꽃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꽃의 수호를 받으며 우리는 무사히 숙소에 잘 도착했다.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박노해)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취리히에서 제시간에 열차를 탔다면 아마 편안하게 그린델발트를 더 즐길 수는 있었겠지만, 불꽃이 하늘을 수 놓은 자정의 그린델발트와 길바닥에서 그 밤 풍경의 일부가 됐던 우리의 모습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삶에서도 여행에서도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⑥ 모바일 탑승권: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행의 고전은 여전히 가치롭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집에서 ‘얼리 체크인’을 하기도 하고 종이 탑승권이 아닌 ‘모바일 탑승권’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과거와는 여러 가지로 수속 및 탑승권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과 후의 여행은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 2004년 첫 배낭여행 때 손에 항상 들고 다니던 것은 휴대폰이 아니라 ‘종이 지도’였다. ‘지도’를 보며 길을 찾다 헤매는 건 다반사였고,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영어로 길을 물었더니 계속 불어로 답이 돌아와 나중에는 그냥 ‘한국어’와 ‘불어’로 대화를 나눴는데 믿기지 않겠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돼서 길을 찾은 재미있는 해프닝도 있었다. 반면, 지금은 인터넷에 무한한 정보가 있어 미리 마음만 먹으면 철저하게 계획을 짤 수 있고, 현지에서도 검색을 통해 최근의 여행지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통역 어플을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덕분에 과거에 비해 훨씬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미리 짜둔 계획대로 여행이 흘러갈 확률도 훨씬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의 여행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고, 사람에 따라 선호하는 여행의 형태가 다르기에 어느 쪽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종종 현재의 편안한 여행보다 과거의 ‘고생길 여행’이 자꾸만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실수의 순간과 길을 잃은 곳에서 또 다른 여행과 인연이 시작되는 게 매일의 일상이었던 그 여행이 어쩌면 ‘여행의 본질’을 더 잘 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나 책이나 그림에 ‘고전’이 있고 그 고전 작품들이 시공을 초월해 여전히 현대인에게도 울림을 주는 것처럼, 만약 ‘여행’에도 ‘고전’이 있다면, 그 모습은 과학 기술 문명이 발달하기 전 여행자가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미지의 세계와 자신의 내면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던 그런 모습일 것 같다. 스마트폰 검색 결과를 보며 휴대폰이 시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요즘 여행은 길을 잃을 위험은 크지 않지만, 과연 이때의 나도 여행의 진정한 주체라 할 수 있을까? 혹 나는 스마트폰에 종속된 ‘객체’로서의 여행자는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은 대표적인 분야로 ‘여행업’을 꼽을 수 있다. ‘한동안은 해외여행을 가기 어려울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시대에는 여행의 형태가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이제 기존과 같은 여행은 사라지는 거 아닌가?’ 많은 예측들이 오가고, 사실 현시점에서 정답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여행의 주체인 ‘인간’과 주요 요소인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형태는 달라질 수 있어도 여행은 계속될 것이라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그리고 편리한 여행이 가능한 속에서도 종종 과거의 여행을 호출하는 지금의 여행자들의 모습에서 미래에도 어떠한 형태의 여행이 나타나든 ‘여행의 고전’의 클래스는 여전히 가치로울 것이라 믿는다.         


여행을 떠나게 하는 마법, ‘말하는 대로     


2013.08.03. 토 21:37     

체코 프라하성을 바라보며 카를교 근처에서 피보 한 잔.
아니면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가에서 야경 사진 한 컷.
그것도 아님 싱가포르 클락키에서 칠리크랩과 맥주 한 잔.
지금 이 순간 my wish.     


  지금은 다른 SNS에 밀려 많이 사용하지 않는 추억의 싸이월드에 나는 종종 일상 이야기나 교단 일기를 기록했었다. 싸이월드의 기능 중에 ‘투데이 히스토리’라는 기능이 있었는데, 같은 날짜의 과거에 어떤 기록을 남겼는지 보여주는 기능이었다. 2014년 8월 3일 프라하로 떠나기 직전 무심코 투데이 히스토리 버튼을 눌렀다가 나는 일순간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1년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낙서하듯 짧게 적었던 일기였고, 사실 이런 말을 적었었나? 기억조차 없이 잊고 있었는데 정확히 1년 후 나는 1년 전 소망했던 체코와 헝가리로 떠나는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생각해보니 저 일기를 쓴 후인 2014년 초에 싱가포르에도 또 교육기행 인터뷰를 하러 갔었구나. 국어교사로서 ‘말의 힘’, ‘언어의 주술성’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새삼 말이 지닌 힘은 정말 위대함을 느낀다.


  자, 여기 ‘백지 탑승권’이 있다. 이름, 출발지, 도착지, 날짜, 편명 모두가 비어 있다. 지금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제대로 된 여행을 가본 적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설렘 가득한 기대와 오감을 동원해 생생하게 꿈꾸는 즐거운 상상이면 충분하다. 적는다고 손해 볼 것은 없으니 그곳이 언제든 어디이든 마음껏 꿈꾸며 백지 탑승권을 채우고, 잘 오려 책 사이에 끼워 두자.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손끝에서 당신이 쓰고, 꿈꾸고, 생각하는 대로 새로운 여행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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