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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림 Oct 15. 2021

독이 되는 것들

여행에세이 <외로워서 떠났다>

늘 그렇듯 이번 여행에서도 등짝은 내 몸집보다 큰 가방에 내어주었다. 나름 줄인다고 줄였지만 노트북, 태블릿, 충전기, 읽을 책, 여분의 옷가지와 신발, 세면도구 등등 필요하면 근처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까지 챙겼다. 주말이면 옷가지와 생필품으로 가득 채워진 캐리어가 배달오기로 되어있는데도 말이다. 외국이든 국내든 스물이든 마흔이든 혼자 떠나는 여행 앞에서는 이렇듯 애써 숨겨둔 졸보 기질이 발현된다. 


정시에 출발한다는 ITX열차. 혹여라도 놓칠까 배낭이 들썩이도록 뛰었다. 헐레벌떡이며 용산역에 도착하니 출발시간까지 한참이 남았다. 코로나 거리두기는 플랫폼에서도 예외 없었다. 곳곳에 빈자리가 있어도 앉을 수가 없으니 20키로 남짓의 무게를 견디며 기차가 올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 했다. 30도를 웃도는 이례적 가을 날씨에 등줄기에서는 말릴 수 없는 땀이 흘러내렸지만, 멀리서 어렴풋이 전동차 소리가 들려올 때면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기 시작했다. 고단한 몸과 달리 아주 오랜만의 기차여행에 기분만은 한껏 고취되어 있었다.


12시 53분.

“춘천행, 춘천행 열차, 지금 출발합니다”


20여 년 만에 다시 오른 춘천행 열차.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땀에 젖은 배낭에 그리고 촉촉해진 마음 한 구석에 담아왔다. 오랜만에 손 글씨를 써 볼 요량으로 펜과 종이를 챙겼고 요즘 다시 흥미를 느끼게 된 일회용필름카메라도 넣어왔다. 삶은 계란과 사이다도 사 먹을 생각에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런 나의 소소하고 가상한 노력은 기차에 타고 일분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기대했던 낭만 따윈 없었다. 비행기 객실을 연상케 하는 부드럽고 안락한 시트와 융이 깔려진 바닥, 좌석 간의 간격도 꽤 넓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새 것 같았다. 사실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 본 기억조차 까마득했고 처음 타보는 ITX에 대해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20여 년 전 풍경만 그리면서 왔기에 잠시나마 그때의 감성을 느끼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꺼내려던 펜과 종이, 필름카메라는 다시 가방으로 밀어 넣었다. 눈치 없이 뱃속에선 알람을 보내왔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가끔 아는 것이 독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 나의 무지함과 안일함이 독이 되었다. 하지만 실망하기는 이르다. 여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춘천에 도착하면 우선 성난 배부터 달래야겠다.


여행에세이<외로워서 떠났다> #독이 되는 것들



작가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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