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일까]
해도 해도 안될 때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건 포기, 손을 놓는 것이다.
60여 년을 살면서 딱 한번, 신용불량자가 되었을 때 그런 경험을 했다.
사방이 꽉 막혀 있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곳이 모두 차단되었을 때 나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다 놓았다.
그때 나의 신, 나의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셨고, 나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았다.
이제 두 번째 포기의 순간이 왔다.
아들에게 신장을 이식해 주면서 어리석게도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은데 말이다.
행복도 불행도 항상 진행 중이라는 걸 몰랐었나 보다.
아들의 건강검진 결과는 심각했다.
이 녀석이 잔소리가 싫으니까 나에게는 대충 몇 마디 말로 설명하고 끝냈는데 평소 속이야기를 잘하는 누나에게는 당뇨 위험이 있다는 결과를 말해줬다.
딸은 걱정이 되어 나에게 기도 해 주라며 넌지시 그 둘의 비밀(?)스런 검진결과를 말했다.
아직 암수술도 안 했다.
기본적으로 암 진단을 받으면 전이 여부검사를 위해 CT촬영을 하나보다.
CT촬영을 위해 투여하는 조영제가 신장에 치명적이라 이식환자인 아들은 촬영을 하지 않았다.
(검색해 보니 조영제 부작용으로 사망한 신부전 환자 기사도 있다.)
수술을 하면서 열어봐야 전이 여부를 알 수 있다던 의사 소견을 이제야 말한다.
긍정감옥에 갇혀서 '괜찮을 거야'를 습관처럼 말하던 아들이 걱정한다.
갑상선암까지는 그래도 받아 들일수 있단다.
그런데 만일 수술 중에 전이가 된 걸 발견하게 되면 수술 후 깨어나서 뒷감당을 못할 것 같다고 한다.
여태 탕자처럼 살다가 이제 믿음이 회복되어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봉사도 시작했는데 왜 하필 지금이냐며 눈이 붉어지는 아들에게 해줄 말이 없다.
모성애의 한계다.
이 사건이 해석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기다림 동안 아프게 성장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한걸음 가까워질 것이다.
당뇨위험을 알려준 의사는
"내년 검사에서도 수치가 같으면 당뇨약 드셔야 합니다. 운동 꼭 하세요."
라고 했다는데 당뇨이야기는 딸에게 들었으니 모른 체 하고
"요즘 운동 하니?"
라고 물었다.
스쾃와 런지를 한다고 했다.
생각 같아서는 헬스장에 다니라고 하고 싶지만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일단 말을 아꼈다.
대신 누나가 나보다 더 심각하게 잔소리를 한다.
"너 당뇨의 문은 한번 들어가면 끝이야.
나오는 문이 없어.
들어가기 전에 관리해야지."
왜 그렇게 겁을 주냐면서도 누나 말은 듣는다.
신기할 따름이다.
원수 같이 싸우고 무시하던 누나 말을 듣는 것이...
카페에 가면 항상 커피와 함께 케이크를 주문해서 먹던 애들이 케이크를 참는다.
카페에서 케이크 참기 vs 배고플 때 밥 참기
쌍벽을 이룰 만큼 꼬박꼬박 챙겨 먹었는데 결심을 하긴 했나 보다.
어릴 때 같으면 내가 모든 부분에 관여하며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독립해서 사는 어엿한 성인이니 잔소리마저도 쉽지 않다.
내 말 안 듣는 건 지 아빠랑 똑같다.
그래도 이번 암진단 이후 아들이 많이 달라져서 가끔 낯설게 느껴진다.
자기 확신의 힘이 빠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걸 깨닫고 있다.
하나님의 큰 그림을 언제 보게 될지 모르지만 풀무불속의 다니엘처럼 고통의 터널을 잘 통과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