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달력의 24절기와 15일마다 달라지는 우리의 일상
편의점에 가서 메뉴를 고를 때, 당신도 모르게 24절기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춘분이 지나 봄바람이 완연해지는 3월 말 즈음엔 편의점 냉면 코너가 살짝 채워지기 시작한다. 얼큰한 삼각김밥 대신 시원한 냉장 라면, 간단하게 얼린 과일 빙수를 찾는 손이 늘어난다. 상현(3월 초)보다 입춘(2월 4일경)을 지나고 경칩(3월 6일경)쯤 되면 이미 한겨울 메뉴는 옷깃 속으로 숨어버리고, 봄 맞이 가벼운 입맛을 겨냥한 신메뉴들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여름이 본격화되는 소만(5월 21일경) 무렵, 편의점 냉장고에 쌓여 있는 냉두유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남다른 할인율을 과시한다. 더위가 시작되면 달콤한 빙과류가 전면에 배치되고, “냉장 음료 30% 할인” 스티커 너머로 반짝이는 얼음 결정이 남성의 등골을 시원하게 만든다. 망종(6월 6일경)이 가까워질수록 모닝커피 대신 시원한 이온 음료를 집어드는 당신의 손이 바빠질 테다.
이런 변화는 옷가게도 마찬가지다. 하지(6월 21일경)를 기점으로 여름 세일 시즌이 돌입하면, 자켓은 점점 더 후순위로 밀리다가 소서(7월 7일경)에 접어들면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가 주인공이 된다. 대서(7월 23일경) 무렵엔 냉감 셔츠와 메쉬 소재 운동화 쪽으로 시선이 쏠리며, 하현(하현달, 달이 기울기 시작하는 시기)과 맞물려 재킷 신상품 출시 따위는 잠시 잊힌다. 대신 겨울 입고서야 볼 수 있을 릴레이 패딩 할인 행사가 가을상강(10월 23일경) 즈음에 예고되기도 한다. 즉, 봄철에는 기능성 셔츠가, 여름철에는 쿨링 티셔츠가, 가을엔 가벼운 재킷이, 겨울엔 패딩이 절기별 추천 메뉴처럼 돌아가며 뜨고 진다.
게임 캐릭터 디자인에서도 절기의 기운은 묘하게 비춘다. 예컨대 봄이 무르익는 경칩 즈음에 발표되는 MMORPG ‘엘리시움 페널’의 신규 캐릭터 ‘녹음의 법사(Nymph of Vernal)’는 녹색 기운과 꽃잎 효과를 머금은 스킬을, 여름 절정인 하지 무렵에는 ‘열기 소환사(Flare Summoner)’ 같은 불속성 캐릭터가 출시된다. 소설·대설 사이, 즉 겨울이 막바지일 때 등장하는 얼음 속성 히어로 ‘빙설의 검객(Frostblade Duelist)’은 바람 한 점에도 등골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준다. 개발자는 “절기를 의식한 스킬 사운드와 이펙트, 한정 의상 티어를 준비하면 출시 초반 서버 폭주가 보장된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이처럼 24절기는 당신의 쇼핑 카트, 당신의 옷장, 심지어 게임 내 캐릭터 선택에도 은근히 개입해 있다. 봄바람에 얼큰한 국물 대신 시원한 냉면을 갈망하게 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눈에 띄는 할인 스티커 대신, 브라우저의 패션 페이지를 새로 고침하며 “입추가 지났으니 가을 패딩이 돌 때”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해보라. 이 모든 건 절기가 짜놓은 농사 달력 같은 타이밍이 당신의 소비 패턴과 일상의 리듬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24절기는 ‘자연이 미리 알려주는 신호등’이다. 남성이라면 한 번쯤 편의점 메뉴를 고르다 말고 “이 냉두유 할인, 소만 지나서 시작됐나?” 하고 무심코 절기를 계산해보길 권한다. 옷장 앞에서 “하지가 와버렸으니 반팔을 꺼내야지” 하고 무심히 머뭇거릴 때, 삶이 조금 더 자연에 순응하며 유연해진다. 게임 캐릭터 선택 화면에서 “이 봄 법사, 경칩 기운을 받아 더 강해졌나?” 하고 호기심을 품으면, 도깨비불처럼 반짝이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절기가 없는 세상에서는 이 모든 호흡과 리듬이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에겐 스마트폰 앱과 달력 속 24절기가 있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옷 매장 피팅룸에서, 게임 로그인 화면에서, 당신은 이미 절기의 그물에 걸려 흐르고 있다.
그러니 오늘은 무심코 달력 한 구석의 ‘소만’을 살펴보고 “냉면 한 그릇 먹어야지” 혹은 “쿨링 티셔츠 세일 때구나”라며 절기의 조각을 자신에게 지혜롭게 활용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