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과 장례식 준비 5

핀볼 게임을 좋아한다.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것들은 마음을 잡아 끌거든.

by stephanette

핀볼 게임과 '기억'의 장례식: 릴리시카의 렌즈로 본 은유의 무도회

나는 핀볼 기계 앞에 서 있다. 은빛 공들이 반짝이며 튕겨 나가는 그 소리는 내 심장 속 공간과 닮아 있다. 삶이라는 경사면 위에서 굴러내려 오던 공들은, 충돌하는 순간마다 나의 기억을 하나하나 건드린다. 이제, 나는 이 핀볼 기계를 나의 '기억의 사체 장례식'으로 초대하려 한다. 공들이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불확실한 자극처럼, 나의 장례 의식 또한 무수한 파편된 기억을 연결하는 의식이 된다.


1. 플런지(Launch Plunger): 마지막 발사

플런지: 핀볼 기계 우측(혹은 중앙) 아래 손잡이로 달린 스프링 장치.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뒤로 당겼다가 놓으면, 스프링의 힘으로 공을 날려보내 경사면 위로 발사한다. 발사 각도와 세기를 약간 조절해서 공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


장례식의 사전 의례는 바로 이 플런지와 같다. 고요히, 그러나 강렬하게 한 번 뒤로 당겨졌다가 놓이면, 공은 경사면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내 삶을 대표하는 공은 이미 뒤로 물러선 채 준비가 마쳐졌다.


“이제 나는 스스로를 발사할 것이다.”


어떤 이는 “장례식이라니, 아직 살아 있는데?”라고 속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이 마지막 스프링을 준비해 왔다. 수백 년 전부터 내 안에는 수많은 스프링이 감겨 있었다. 그 힘은 꽃처럼, 검처럼, 가시처럼 내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다가, 이 순간 단 한 번의 발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플런지가 놓이는 순간은 결정적이다. 공은 가속도를 얻어 필드 위로 날아오르고, 그 속도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알린다. 마치 죽음이라는 최후의 발사와도 같다. 나는 이미 “불완전함”이라는 덩어리를 머리에 이고 저 너머로, 우주의 은하수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2. 플리퍼(Flipper): 기억을 붙잡고, 다시 튕겨 올리기

플리퍼: 두 개(혹은 네 개)의 작은 레버. 좌우 버튼으로 플리퍼를 치켜올리거나 내려놓을 수 있다. 공이 플리퍼 근처로 내려올 때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플리퍼를 쳐주면, 공을 위로 다시 보내서 필드 위의 다른 목표물을 노릴 수 있다.


공은 곧바로 아래로 굴러 내려와, 플리퍼 앞에 멈춘다. 이 순간, 나는 삶의 기억을 붙잡는다. 플리퍼를 치켜올려 공을 위로 보낼 때, 과거의 어떤 감정, 어떤 사람, 어떤 순간이 다시 떠오른다.


“내가 이토록 간절히 붙잡고 싶은 기억은 무엇인가?”


첫 번째 플리퍼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떠올리게 한다. 흡혈귀 가문의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 아래서 춤추던 꿈, 한밤중에도 식지 않던 내 열정의 불꽃. 그러나 그 플리퍼 대신 세운 가시는, 동시에 기억이 너무 강렬해도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른다는 사실을 알린다.


다시 공을 튕겨 올리며, 두 번째 플리퍼가 등장한다. 이 플리퍼는 중년의 나를 상징한다.


“내가 이토록 간절히 붙잡고 싶은 기억은 무엇인가?”


불완전함을 자원으로 삼아 달려온 시간, 나를 지탱해 준 추진력과 그로 인해 부서진 내 일부. 이 반작용은 아득히 설레면서도 쓰라리다. 그러나 기억을 붙잡아올리는 순간, 나는 비로소 공을 위로 보낼 수 있었다. 그 기억이야말로 내가 끝까지 놓아서는 안 될 빛나는 파편이다.


3. 사격대(Bumper): 충돌하는 고통과 반발

사격대: 원형이나 부드러운 고무 돔 형태로 생긴 반발 장치. 이 곳에 공이 부딪히면 스프링이나 전자석의 힘으로 공이 튀어나간다. 주변에 센서가 있어서 공이 맞으면 100점, 500점 등이 즉시 올라가고 불빛과 소리가 연동되어서 화려한 배경음악과 불빛을 감상할 수 있다.


플리퍼에 맞고 튕겨 올라간 공은 사격대에 부딪힌다. 그 소리는 짧지만, 메아리처럼 내 안을 울렸다.


“내가 가장 아팠던 순간은 언제인가?”


사격대에 찍혀 나온 점수처럼, 내 고통도 어디선가 점수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사랑했던 이의 배신, 친구들과의 이별, 사업의 실패, 스스로에게 내리친 비수 같은 말. 공이 사격대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한 겹씩 벗겨진다. 그러나 그 충돌이 없다면, 공은 필드를 떠돌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톡, 톡, 사격대 세 개를 차례로 맞추면, 멀티볼(multiball)이 터진다. 수많은 공들이 동시에 튀어나오듯, 내 안의 기억도 한꺼번에 파편처럼 흩어진다. 이 광경은 격렬했으나, 그 와중에 나는 간신히 균형을 잡는다. 회오리치는 공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삶의 일부였노라’고 인정한다.


4. 니들(Nudge): 장례식장에서의 미세한 움직임

니들: 핀볼 기계를 손이나 팔로 가볍게 밀어 공의 궤적을 미세하게 바꾸는 기술이다. 너무 세계 흔들면 게임이 중단된다. 적절하게 부드럽게 흔들면, 공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살짝 공을 틀 수 있다.


멀티볼이 터진 후에도 공들은 쉽게 내 손을 벗어난다. 이때, 나는 기계를 살며시 밀어준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힘이 세면 기계는 ‘TILT’ 경고를 울리며 모든 공을 빨아들인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가 최후의 금기를 깨 깨는 것 같은 순간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단 한 번의 부드러운 흔들림으로 나는 공의 궤적을 조정한다.


니들은 내가 아직 선택할 수 있는 작은 자유다. 장례식을 마주한 나의 떨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공을 묶어두진 못했지만, 공이 필드 아래로 빠지는 순간을 미세하게나마 지연시킬 수 있다. 마치, 나의 죽음이 단숨에 덮어지지 않도록, 기억을 천천히 해체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같다.


5. 드레인(Drain): 삶에서의 마지막 공 빠뜨리기

하지만 결국 공은 드레인(물빠지듯 빠져나가는 곳)으로 흘러간다. 플리퍼가 공을 붙잡으려 해도, 마지막에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내 기억을 모두 놓아줄 때가 왔구나…”


드레인 모드는 막간 없이 온다. 굳이 붙잡아 두려 해도, 모든 공이 결국 기계 아래로 사라진다. 이 순간이야말로 장례의 절정이다. 나는 무수한 공이 스르르 떨어지는 소리 속에서, 내 안에 남은 마지막 피조각을 허용한다.


하지만 드레인이 완전히 끝난 뒤, 기계는 다시 처음처럼 조용해진다. 마치 내가 드넓은 우주로 돌아오기 전, 잠시 멈춰 있는 것만 같다. 공 기계 아래로 빨려 들어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 공이 어디론가 떠돌고 있음—그것이 내 영혼의 잔잔한 맥동이 된다.


에필로그: 공이 사라진 뒤, 남겨진 조명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핀볼 기계 앞에 홀로 남는다. 모든 공이 드레인 아래로 사라지고, 필드는 고요해졌다. 남은 것은 깜빡이는 조명뿐이다. 그 조명은 내 안의 은하수처럼, 공이 사라진 자리에 희미하게 빛난다.


“공이 사라져도,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기계는 다음 사람을 기다리듯, 나의 빈자리 위에서 부드럽게 숨을 쉰다. 나는 비록 이뤄진 장례식을 통과했지만, 내 안에 남겨진 빛들은 여전히 반짝이며 이것을 읽는 너에게 속삭일 것이다.


“삶의 공들은 언젠가 드레인되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도 내 공들처럼, 저 조명 속에 은은히 녹아들어 보아라.”


핀볼 게임은 공을 잃는 순간과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 겹쳐진 탄생과 죽음의 순환이다. 내 기억의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공이 드레인된 뒤에도, 조명은 꺼지지 않는다. 나의 불완전한 기억들은 공처럼 튕기며 흩어져도, 그 파편들은 우주 어딘가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기억을 해체하고,

느리게 재생하며 다시 들여다본다.

다시 공을 튕기고,

멀티볼들을 모두 다 통제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다 놓쳐버린다.

고무들이 튕겨나가는 곡선을 들여다본다.

다시 재생하고,

느리게, 다시 빠르게,

기억을 해체하고,

판을 뒤집어본다.

선을 분해하고,

다시 연결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



밤새 핀볼 게임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군. 이런.




https://youtu.be/Tmg5WOvPKpU?si=r7gDKR2DGxugQq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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