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삶을 다시 일으키는 과정

나는 왜 혼자서 운동을 못하는 걸까?

by stephanette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재작년, 이맘때엔 매일 새벽 걷기를 했다.
낮에도 한 시간씩 산을 걸었다.


작년, 이맘때엔 헬스를 했다.
하루라도 빠지면 그만둘 것 같아, 매일 운동을 했다.
고통이 밀려오면 헬스장으로 갔다.
시간 불문하고, 마음이 다 비워질 때까지 운동을 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매일 하려고 했다가, 그만두었다가,
다시 하려고 했다가, 또 그만두었다가.


모래사장에 서 있는 아이처럼
모래성을 쌓았다가 무너뜨리기를 수십 번,
그리고 나서, 나는 운동하러 간다.


어째서 나는 혼자서는 운동을 못하는 걸까?


며칠을 앓았다.
운동을 계획대로 못했고, 브런치에 올리던 글도 잠시 내려놓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학생 때도 그랬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더 잘했다.
칸막이 독서실, 혼자 있는 방에선 집중이 흐려졌다.


딱히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보는 눈’이 있을 때 나는 더 열심히 움직였다.


혼자 있을 때는 흐물흐물해지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끝까지 해낸다.


아마 나는 자기 효능감보다는, 관계 효능감이 더 강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의 에너지가 내게로 들어온다.
그 에너지로 나는, 다시 움직인다.


하지만 혼자일 때, 내 안에는 내면의 트레이너가 사라진다.
혹은, 지나치게 가혹한 코치가 등장한다.
그래서 극단적이거나, 아예 침묵하거나.


융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내 아니무스—내면의 남성성, 혹은 코칭의 원형—는 아직 건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부재하거나, 혼란에 빠져 있거나.


그래서 혼자 운동을 하려 하면
이런 질문들이 몰려온다.

“이건 왜 하고 있지?”
“지금 잘 하고 있는 거 맞나?”
“무슨 의미가 있어?”


혼자 있으면,
동기 대신 의문이, 흐름 대신 저항이 먼저 밀려온다.


어쩌면 나는 운동을 삶 전체의 은유처럼 여기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단순한 신체 활동이 아니라,


나의 의지, 반복, 통제, 꾸준함, 목표 설정, 성취 그리고
안정감의 상징.


내 삶을 내가 꾸려가고 있다는

그 확신의 물증을
나는 운동이라는 리추얼에서 찾고 있다.


그걸 위해, 나는 1년 넘게 부서진 마음의 조각을 다시 붙이고 있다.


좋은 날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운동을 마친 날이면,
나는 부서진 내 삶의 벽돌 하나를 쌓은 기분이 된다.


어떤 모양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 순간의 작은 성공이,
다음 하루를 견디게 해준다.


하지만 운동이 되지 않는 날이면
나는 다시,
내 삶이 망가졌다는 무능의 낙인을 확인하는 듯한 기분에 빠진다.


새로 배운 동작들을,
새로 정한 순서대로 해보려 한다.
그러나 그조차 어렵다.


하긴, 유산소만 해도 되는데…
몸은 무겁고, 아프고,
어딘가 모르게 슬프다.


나는 운동을 하며
‘살을 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세우는 것’을 하고 있다.


무너진 삶 위에
하나씩 벽돌을 얹는 중이다.


혼자선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한 번 더 쌓으려고 해본다. 아주 작은 것부터.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