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의 소설 '고래'와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면서
시간이 느리거나 빠르게,
때로는 멈춘 것처럼, 때로는 소용돌이치듯 흐르는 느낌
문학은 단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살아보게 한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는
한국 현대소설이면서도 아주 드물게
"마술적 리얼리즘(Magic Realism)"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작품이다.
라틴 아메리카 소설과 닮았다.
'고래'는 극도의 가난, 폭력, 억압, 삶의 비참함을 다루면서도
이야기 속에서는 거대한 고래가 등장하고,
마치 전설처럼 인물들의 삶이 부풀려지고,
환상과 현실이 경계 없이 섞여 흘러간다.
마치 라틴 아메리카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가혹한 현실을 신화화하고, 우화화함으로써,
현실을 견디고 초월하려는 영혼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고래'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처받고 무너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천명관은 그들을 불쌍하거나 비참하게만 그리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삶을 신화처럼, 서사시처럼, 거대하게 만들어 간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서도
가난과 폭력과 절망을 다루면서
오히려 그 안에 깃든 인간 존재의 찬란함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고래'도 바로 그런 소설이다.
'고래'는 문장 자체가 살아 있어서
한 문장, 한 장면 안에서도 환상과 현실이 휘몰아친다.
휘몰아친다는 표현이 정확한 만큼 매우 빠른 속도로 읽게 된다.
글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속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책을 놓을 수 없다.
장대한 서사, 거칠고 거대한 숨결.
이런 리듬감, 숨 가쁨, 자유로움은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 문학들과 정확히 닮아 있다.
특히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방식이.
그래서,
'고래'라는 이야기의 겉이 아니라,
그 이야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에서
느껴지는
현실과 환상이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아주 깊은 감수성을
다시 느껴볼 수 있다.
그 서사의 '시간과 공간을 살아낸' 사람 중의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이
소설 '고래'가 가진 힘이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면서
시간이 느리거나 빠르게,
때로는 멈춘 것처럼, 때로는 소용돌이치듯 흐르는 느낌"
'마술적 리얼리즘'의 시간 감각
이런 시간 감각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현실에서는 분명히 1초, 1분, 1시간이 똑같이 흐르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감정, 기억, 환상, 고통, 희망이 시간을 휘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슬픔이 깊어질수록 시간은 정지하거나 느려지고,
강렬한 열망이나 희망이 피어날 때는 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이러한 시간의 왜곡은
사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감정이 나의 마음을 통해 흘러간다.
현실 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분명한 선형적 세계인데
소설 '고래'와 같은 세계에서는
어떤 사건이 꿈처럼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하고,
한 장면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겹쳐 흐르기도 한다.
어쩌면, 사실은 비선형적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선형적 세계라는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선형적 세계는
그저 상상 속의 잘못된 관념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다만 인간은 '이 순간'을 볼 수 있으니까.
마치 다 찍어놓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건 단순한 플롯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렇게 꿈꾸듯 펼쳐지는 것일지도.
"삶이란 원래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이런 숨은 주제가 작품의 바닥에 깔려 있다.
"문학은 단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살아보게 한다."
소설을 읽으며, 고래 속의 그 세계를 진짜 살아본 기분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아주 깊은 차원에서
'환상과 현실을 끌어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간혹 알게 되는
시간 왜곡,
현실과 환상의 교차는,
우리 스스로도 이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소설의 독자이자, 동시에 창조자.
'백 년 동안의 고독' 만큼이나 적극 추천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