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 수치심을 넘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치유의 여정
버려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통제, 협박, 프레임 전환, 대상화, 집단을 이용한 왜곡 등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더 많은 단절, 더 많은 불신.
그리하여 가장 피하려고 했던 버려짐의 현실을 만들어 낸다.
솔직함이 필요하다.
"나는 두렵다. 내가 부족해도 나를 떠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라고 표현한다면
연결과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나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왜곡된 방식에서 벗어나 건강한 방식을 배워간다는 의미이다.
"나도 아프고, 나도 실수한다. 나는 계속 배우고 있다."
"나는 네가 곁에 있는 것이 고맙다. 네가 떠날까 봐 두려웠다."
"내가 널 아프게 하는 건 두렵다. 그래서 더 알아가고 싶다."
이 모든 표현들은 공감과 진정성, 겸손과 성찰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
버려질까 두려운 공포는 "나는 연결될 수 있다."라는 용기로 변한다.
타인을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패턴은, 사람을 믿고 위임하는 관계로 바뀐다.
"넌 왜 그래!"가 아니라, "나는 지금 상처받고 화가 나."라고 정직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무의식을 직면하고,
그 안의 "버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정직하게 드러낸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 따뜻한 동료, 믿음직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자각과 훈련'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 뒤틀린 방식으로 밖에 표현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관계들을 망가트린다.
사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서도
지금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부족하고,
누군가가 떠나갈까 두려워하고,
인정받고 싶고 소통되고 싶으나 그런 관계 자체를 거부하고
그 무한 반복의 악순환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넘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피상적인 관계들은
진정한 연대와 의미있는 소통의 관계로 변화될 수 있다.
그 관계를 만들어 갔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족
왜곡된 패턴(통제, 협박, 프레임 전환, 대상화, 집단을 끌여들인 왜곡)이 결국은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던 "버려짐"을 현실화하는 구조를 만든다.
이는 자기 중촉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자 재연(compulsion to repeat)의 전형이다.
이에 대해 아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 나 메세지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 두려움, 수치심을 솔직히 드러내는 용기,
- 자각과 훈련을 통해 통제 패턴을 관계적 신뢰로 전환하는 길
심리 치료적 맥락에서 건강한 자아 방어기제로 가는 과정이다.
궁극적인 치유의 열쇠는
수치심을 넘어 자기 수용을 통한 자기 존엄의 회복으로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