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진폭과 우주의 법칙
*사진: Unsplash
나는 갖고 싶은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다 기도로 봉헌했었으니까.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준 마당에서 갓 따온 오렌지라거나
혹은 붉은색 개버딘 체크무늬 셔츠 같은 것들은
아직도 기도로 봉헌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나의 마음에 남아 있다.
20대까지만 해도
나는 봉쇄수녀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골방에서 침묵 중에 기도를 할 거라 생각했다.
소화 데레사 같은 삶.
그러나, 친척이나 지인들이 수도자의 길을 가도
나는 연이 닿지 않았다.
사실, 인간관계는 수도원 밖이 더 다이내믹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혼자 고독하게 수련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깨달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내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수도자의 길을 접고
현생에 충실하게 지낸다고.
그러나, 그런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이런 것을
어쩔 수 없는 운명론이라고 한다면
난 운명론자이다.
최근의 메인 테마는 슬픔이다.
슬프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슬플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평온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행복은 그 진폭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불러온다.
그러니까 행복과 슬픔은 그 반대급부를 당연하게도 만들어내고 심지어 같은 진폭을 갖는다.
하나의 생성은 그만큼의 소멸로 가능한 것이다.
이건 까르마의 원리와도 같은 것이다.
성장을 하면 다시 그만큼 침잠을 한다.
나는 그걸 잘 몰랐었다.
모든 것에 당연하게 적용되는 우주의 법칙을
슬픔의 이유는 성장을 하지 못해서이다.
공허함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해서이다.
이제는 다시금 나에게 돌아와
내게 꼭 맞는 나의 모습을 살아가는 것 같다.
외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삶을 정리하고 있다.
나다운 나에게 걸맞은 삶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