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말랑하게 만드는 방법

타인의 미묘한 변화에 집중하는 순간, 자의식은 사라진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샌포드 마이스너(Sanford Meisner)의 Meisner Repetition Exercise를 보고 나서

- 연기 기법을 통해서 배우는 현존


사람과 마주 앉을 때,

내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는 건 ‘나 자신’이다.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일까, 목소리가 떨리진 않을까,

상대가 내 말을 어떻게 들을까.

그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나는 이미 ‘지금’에서 조금 멀어져 있다.


그런데 아주 희미한 순간,

상대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숨이 조금 고르며,

입술이 말의 앞에서 머뭇거리는 걸 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문득,

내 안에서 들리던 ‘나의 목소리’를 잊는다.

그 대신 상대의 온도와 리듬이

나를 통해 그대로 통과한다.


그 순간 자의식이 사라진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지금-여기의 흐름 속에서

감정이라는 파동을 함께 타는 존재가 된다.


1. ‘나’를 보지 않고 ‘너’를 듣는 일

감정이 딱딱하게 굳을 때마다

우리는 대부분 ‘나’를 너무 많이 본다.

내가 불안한 이유,

내가 실수하지 않기 위한 방법,

내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말들.


그때 시선을 천천히 옮겨본다.

상대의 손끝, 목소리의 높낮이, 말이 멈출 때의 숨결.

그 안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타인의 미묘한 변화에 집중하는 순간,

‘나’라는 무거운 짐이 풀린다.


2.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일

감정이란 늘 안쪽으로 흐른다.

우울, 긴장, 분노는 모두 ‘나에게로의 몰입’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 방향을 살짝 바꾸어

‘너에게로의 관찰’로 틀어주는 순간,

감정은 부드러워진다.


내가 아닌,

지금 내 앞의 사람에게 감각을 맞추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열린 감정의 상태가 된다.

그건 감정이 없어진 게 아니라,

감정이 흐르는 통로가 넓어진 것이다.


3.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연기처럼

연기 훈련에서 이런 말이 있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상대의 작은 변화에 즉각 반응하는 순간,

우리는 연기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화 속에서 상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읽어내고,

그에 맞춰 나의 말과 호흡이 달라지는 순간,

자의식은 녹고, 관계는 살아난다.


그건 일종의 현존의 기술이다.

‘나를 의식하지 않기’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의식하기’로써 이루어지는 기술.


4. 감정이 다시 말랑해지는 순간

감정이란 ‘닫힌 나’의 벽을 부드럽게 여는 손길이다.

그 손길은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타인의 작은 떨림을 느끼는 순간,

그 미세한 진동이 나를 흔들고,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린다.


그게 바로 감정을 말랑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대신,

타인의 숨결로 지금을 느끼는 것.


그때 마음은 더 이상 돌덩이가 아니다.

조용히 빛을 머금은 점토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고,

무언가를 새롭게 빚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5. 결국, 감정은 ‘함께 있음’에서 피어난다

감정이란 혼자 있는 내면의 온도가 아니라,

둘 사이의 온도차에서 태어나는 빛이다.

타인의 변화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빛은 조금씩 커지고,

나와 너의 경계는 느슨해진다.


그때 자의식은 잠잠해지고,

지금-여기가 온전히 열린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연기 — 삶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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