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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의미

장래희망처럼, 직업도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장래희망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라는 말을 들었었다.

'의사'가 아니라 '약자를 도와주는' 의사라고.

현생의 밥벌이를 하는 직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명의식을 갖고

세속적 일의 방향성을 잡고 살아왔다.

그래서 돈과는 상관없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일 중독 상태로도 살았었다.

그 시절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가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부러워했다.

일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돈까지 벌다니라는 식의 말들을 들었다.


나는 지금도, 세속적 일의 형태는 영혼의 여정 중 하나의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지닌 달란트와 소명의식을 실천하는 데에는

그 형태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나에게 일은

소명의식을 구현하는 형태이다.

의미를 만들어내고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가치와 윤리를 구현하는 장

으로 일을 이해하고 있다.


한때, 그 일이 흔들렸던 적이 있다.

부당함, 폭력성, 모욕, 그리고 구조적 악의 충돌은 매우 크게 다가왔다.

나는 어째서 이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지 궁금했다.

왜냐하면

일이 존엄을 손상받는 장소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 흔들림은

내가 해온 모든 의미를 의심하게 만드는 경험이기도 했다.

세속적 성공의 좌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이다.


그 많은 고통스러운 경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직업의 형태는 영혼의 여정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나의 소명은

나의 의식과 영혼의 파동이 어디로 흐르느냐로 결정된다.

그게 어떤 직업이든, 어떤 조직이든, 어떤 구조의 안에 있든

그리고 나는 내 진동에 맞는 곳들과 연결될 것을 신뢰한다.

직업과 분리된 소명(vocation without occupation)이라고 하자.


다만,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붕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살아가려고 한다.


상처가 있었음에도

악의를 마주했음에도

시스템이 흔들렸음에도

직업의 형태가 뒤흔들렸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정한다.

내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내가 선택한다.

어떤 형태의 일을 할지 내가 결정한다.

어떤 사람을 내 세계에 들이고 배제할지 결정한다.


궁극적인 형태의 자유라고도 생각한다.

세속적 일이 흔들린 덕분에

최악의 상황일 때, 주체성을 회복하고

나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직업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만이라면,

삶은 잿빛으로 음울해진다.

한 번 밖에 없는 삶이 고작 그런 의미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각자의 삶의 의미에 따라

직업의 '형용사'와 '명사'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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