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르주나, 공(空)의 철학자

대승불교의 원리와 실생활 적용 - 세속제와 승의제의 이중시선 탑재하기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나가르주나는

2~3세기경 인도에 살았던 대승불교 철학자이자 수행자이다.

용수보살이라고도 불린다.


불교의 궁극 논리학자이자

공의 철학자이자

중관파의 창시자이다.


나가르주나 사상의 중심축은 공(空)과 중도(中道)이다.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는 '있다'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잠시 그렇게 나타날 뿐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핵심 두 가지,

공(śūnyatā, 空)

연기(pratītyasamutpāda, 緣起)

이 둘의 균형점을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1. 공(śūnyatā, 空)이란,

텅 비어서 '고정된 본질'이 없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오해되기 쉽다.


변하지 않는 실체란 없다.
영원한 자아 같은 건 없다.
사람, 관계, 사건, 감정, 개념 전부 고정적 본질은 없다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특정 갈등 상황에서 대면한 사람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

욕망

상처

선택

사회구조

사람과의 만남

권력과 힘에 대한 왜곡된 감각

이런 조건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2. 연기(pratītyasamutpāda, 緣起)란

조건이 모여서 잠깐 이렇게 보일 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원리이다.


조건 A, B, C가 모이면 어떤 사람의 행동이 나오고

조건이 변하면 그 사람의 행동도 바뀌고

관계도, 감정도, 사건도 계속 변형된다.


그러니,

어떤 것도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공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다."


3. 팔불중도(八不中道)는 나가르주나의 시그니처 논법이다.


불생불멸 - 진짜 의미에서 절대적인 생겨남도, 절대적인 없어짐도 없다.
불상불단 - 완전히 동일하지도 않고,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다
불일불이 -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불래불거 - 진짜 의미에서 어디서 오는 것도,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언어로 "이거야!"라고 붙잡는 모든 규정은

결국 일면적이고, 조건적이고, 부분적이다.

그래서 극단적 단정은 모두 다 잘라버린다.


중도는

실체화와 허무화 그 둘 다를 잘라내는 칼날이다.


'이건 100% 진짜야, 절대 변하지 않아'라는 실체화와 집착,

'다 의미없다, 아무것도 없어'라는 허무주의

그 둘을 다 깨는 것이다.

그러니 중도란,

모든 것은 공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인연, 행동, 선택은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관계와 행동의 인과를 정확하게 보고,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는 관점이다.


삶에서 경험하는 관계적 갈등

인간의 폭력성, 탐욕

상처와 분노

사회 제도와 질서

영적 각성과 사유

이 모든 것들을 나가르주나식으로 보면,


1. 인간관계의 상대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성장과정, 상처, 선택, 사회, 욕망, 인연이 엮인 현상

2. 나도 고정된 역할이 아니다.

내면, 과거, 소명, 통찰, 선택이 만들어낸 역할

3. 사건 자체도 고정된 비극이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업장 즉, 까르마를 통과하기 위한 리추얼이다.

4.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의식이 상승하는 바로 그 타이밍이 연기의 완벽한 예시이다.


다시 설명하면,

인간관계의 갈등에서 상대방에게 의미를 부여하지도 말고,
이 모든 것을 헛것이라고 부정하며 도망치지도 말라.
이 사건이 공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거기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 자유에서 나오는 행동이 진짜 '보살의 행위'다.




나가르주나의 대승불교의 철학을 배우며 나는 생각했다.

그냥 다 내려놔라. 용서해라 라는 책들보다 더 황당하다고.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그런 의미는 아니다.

까르마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그러니 관계 자체가 고통이다.

삶은 고해이다. 고통의 바다.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바는 이러한 것이다.

상대에게 매달려 네 영혼까지 같이 끌려 내려가지 말고,
똑바로 보고, 할 일은 하되,
그 사건이 네 정체성 전체가 되게 두지는 마라.


실체가 없고 다 연기라면

그저 모든 것은 다 현상이니 넘겨야 하는 것일까?

공? 중도?

결국 집착하지 말고 용서해라 이 소리인가?


그러나 나가르주나가 하는 말은

힘들어도 다 참고 용서하라는 말도 아니고,

이 세상은 환상이니 아무 상관 없다도 아니다.

이 일이 진짜 있긴 한데, 그게 네 전체가 되게 두진 마라는 관점이다.


나가르주나의 핵심 두 가지

1. 세속제 -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진실

실제로 폭력을 행사했다.

상처받았다.

갈등이 심화된다.

돈, 신체, 마음 전부 진짜로 영향을 받는다.


2. 승의제 - 보다 더 깊은 차원의 진실

이 모든 것에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다.

갈등의 대상자라는 규정은 영원한 본질이 아니다.

사건은 조건들이 만들어낸 한 시기의 구조일 뿐

시간 속에서 분해되고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다.


나가르주나는

두 층위를 동시에 보라고 한다.

어느 한쪽만 붙잡으면 자신은 무너진다.


세속제만 붙잡으면

특정 정체성을 갖고 평생 심리적 고통 속에 붙잡혀버린다.


승의제만 붙잡으면

다 공이야, 어차피 악연이야 하면서

현실 대응을 포기하고 자기를 지키지도 못한다.


중도는 이 둘을 동시에 잡는 것이다.

그러니, 집착과 무기력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집착은 "내 인생은 망했고, 모든 것은 저 인간 때문이다."이고,

무기력은 "다 인연이고 공이니 그냥 포기하자"라면,

중도란, "저건 실제로 있었고 난 그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

하지만 이 사건이 내 인생의 '정의'가 되게 두진 않겠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용서해라"와는 완전히 다른 결이다.


나가르주나식의 중도는

자신의 감정을 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분노에 평생 내 영혼을 저당 잡히진 않겠다."라고 결심하는 것이다.

즉, 감정을 지우는 게 아니라,

감정에게 내 인생의 운전대를 뺏기지 않는 방식이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전장을

세속제와 승의제,

두 레벨로 동시에 보는 힘


그것이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철학이다.


공과 연기,

그리고 그 둘의 균형인 중도는,

나의 분노를 무효화하는 말이 아니다

그 분노를 정확한 자리에 놓고,

그 위에 내 인생을 다시 세우게 해주는 관점이다.


이것이 차원 상승의 기술이다.

현실에서 끝까지 대응을 하고,

의식 레벨에서는 거기에 영혼을 박제하지 않고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영적 리더십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