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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원성과 사랑에 대하여

관측자와 관측 대상은 동일하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관측자와 관측 대상은 동일하다는 말은 철학적 은유가 아니다. 이는 의식, 뇌과학, 현상학, 불교와 비이원성, 양자 관찰지 문제가 모두 만나는 지점이다.


우리가 보통 믿는 세계관은 나(주체)가 세상(객체)를 바깥에서 관찰한다. 이 구조는 모든 이원성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비이원성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관측하는 나도, 관찰되는 세계도 결국은 '의식의 동일한 움직임'이자 '개념'이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말은 "세계는 환상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세계가 의식과 별개일 수 없다는 뜻이다.


왜 관측자는 관측대상인가?

현대 인지 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직접" 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뇌가 만든 모델이자 뇌가 해석한 감각 그리고,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생성된 예측이다. 즉, 바라보기 전에 이미 해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다고 믿는 모든 대상은 결국 우리의 뇌 모델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관찰대상은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개념이고, 관찰자는 그 개념을 인식하는 동일한 의식이니 따라서 관찰자와 대상의 경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학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 메를로퐁티는 "나는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를 통해' 드러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세계는 나와 분리된 외부 사물이 아니라, 나의 몸, 나의 감각, 나의 의미 구조 안에서 "출현하는 현상"이다. 즉, 세계는 내 몸을 통해 구성되므로 관찰자와 대상은 실체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비이원성(Advaita Vedanta)은 더 급진적이다. 관찰자가 따로 있고,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스스로를 관찰하는 것이다. 즉, '나'라고 부르는 것은 기억된 자아 이미지이고,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이 구성한 장면이며, 둘 다 의식의 파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되는 것은 곧 관찰자다. 둘은 한 의식이 만들어낸 두 표현일 뿐이다.


왜 과거, 미래를 내려놓아야 비이원성이 열린다고 하는가?

과거는 내가 아니다. 과거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기존의 지식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외부의 것이다. 미래는 내가 아니다. 미래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들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개념이며 이는 뇌 모델에서 "지금 여기"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는 시간의 축이 아니라 현재의 구성물이다. 미래 역시 현재-뇌 모델의 연장 예측이다. 그렇다면 과거인 기억과 미래인 예측은 둘 다 의식의 내용물일 뿐 나의 본질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의식은 기억을 넘어선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의식은 그저 외부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역사, 지식, 민족, 국가 등등의 것에서 파생된 의식이자 기억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이원론에서는 과거를 내려놓고 미래를 내려놓는 순간 오직 '지금'만 남고 그 '지금'이 바로 유일한 실존이라 말한다. '지금'만이 기억이라는 외부의 기준에 의한 필터를 벗고 관찰자와 대상이 합쳐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현존이란 결국 무엇인가?

현존은 어떤 깨어있는 마음의 상태를 넘어서, 관찰자와 대상의 분리가 잠시 멈추는 순간이다. 주체-객체 구조가 사라지는 자리이다. 이는 "내가 본다"가 아니다. "보임을 알아차린다."이다. 이 자리에서는 나도 없고 대상도 없고 경험하는 자도 없고 경험되는 자도 없다. 오직 "경험 그 자체"만 있다.


이것은 왜 일종의 깨달음인가?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이원성에서 나온다.

나는 부족하다

남이 나를 평가한다.

세상은 나와 분리된 타자이다.

나는 과거의 나이다.

미래의 내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고통은 "나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비이원성이 열리는 지점에서는 “나”도 “세계”도 더 이상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경험하는 자와 경험되는 자가 사라지고, 오직 경험 그 자체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분리의 습관 속에서 살아왔다. 기억, 언어, 자기 이미지, 과거의 상처들은 끊임없이 “나”를 만들고 “타자”를 만든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비이원성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고대의 수행 전통들은 이 구조를 해체하는 단 하나의 힘을 지목했다. 관계의 차원을 초월하는 힘, 나와 타자의 경계를 녹이는 힘, 주체와 객체를 하나의 장(場)으로 되돌리는 힘. 그 힘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나”라는 경계를 녹이고, 타자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의 동일한 의식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비이원성적 작용이다. 사랑이 작동하는 순간, 나와 너, 주체와 객체, 관찰자와 대상, 과거와 미래, 이상과 결핍이 모두 같은 장(場)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모든 영성 전통이, 그리고 가장 깊은 철학이 결국 한 목소리로 이 말에 도달했다.


비이원성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른 어디에도 있지 않다.
단 하나의 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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