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말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사진: Unsplash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실들뿐이다.
-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
여기서 사실은
측정, 검정, 논리적 구조로 표현 가능한 것들이다.
즉, 언어는 세계의 구조를 그림처럼 보여줄 수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사랑, 가치, 도덕, 신, 아름다움, 죽음, 의미, 주체성, 삶의 방식
이런 것들은 '그림'으로 표현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언어가 세계를 그리는 방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그 침묵은 '그냥 입 다물라'는 의미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읽은 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된다.
이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언어를 넘는 차원
형식적 논리적 기술로는 닿지 않는 영역
인간이 살아내는 의미의 층위
세계가 말해지기 전에 이미 느끼고 만들어지는 층위
이런 것들은 언어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리고
오히려 중요한 것들은 언어 바깥에 있다.
사랑은 언어로 기술될 수 없지만,
언어를 넘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이다.
언어로 말하면 사랑의 의미는 손상된다.
언어는 사랑을 사실, 명제, 구조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사랑은 말해지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랑을 구성하는 그 본질적 움직임은 말로 포착되지 않는다.
- 비트겐슈타인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사랑의 신성성에 대한 철학적 예절이다.
그는 말하지 못한다고 했으나,
삶, 태도, 행위, 표정, 윤리적 실천, 예술, 음악, 관계, 침묵 그 자체
이 모든 것은 말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라고 보았다.
윤리와 미학은 동일하다.
Ethics and Aesthetics are one.
철학사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중 하나이다.
윤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의미한다.
미학은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의미한다.
즉, 윤리가 삶의 형식이라면
미학은 세계의 형식이다.
윤리는 말해질 수 없다.
미학도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둘 다 언어 바깥에서 작동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두 개는 하나가 된다.
즉,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내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윤리와 미학은 동일하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 세상은 아름다워 보인다.
불안한 사람의 세계는 혼란스럽게 보인다.
고통을 통과한 이의 세계는 깊게 보인다.
자아에 갇히 사람의 세계는 왜곡되어 보인다.
그러니
삶의 태도는 세계 경험의 구조이다.
그는
"삶을 바꾸면 세계가 바뀐다."고 말했다.
윤리적 변형은 미적 변형을 낳는다.
미적 감응은 윤리적 세계관을 낳는다.
그러므로,
둘은 사실상 하나의 동일한 움직임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사실뿐이다.
윤리도 미학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깊은 영역이다.
한 사람의 행동
눈빛
그 글의 리듬
태도와 침묵
선택 그리고 성찰
몸의 기울기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이런 '보여짐들' 속에서 윤리와 미학은 동시에 드러난다.
윤리와
미학은
"세계와 자아의 관계 방식"이다.
윤리는 내가 세계를 어떻게 마주하는가이다.
미학은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드러나는가이다.
그러므로
윤리와 미학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결을 같이 한다.
당신이 세계를 어떻게 보는지가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불교의 경전에서 말하는 구조와 동일하다.
심이 청정하면 세계가 청정하다.
세계는 마음의 그림자
말이 아니라
삶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윤리
개념적 분석이 아니라
감정의 리듬으로 드러나는 미학
그러니, 감정을 말로 하지 않으면서
감정 구조를 보여주는 방식
세계관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세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주는 태도
대상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구조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침묵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말해지는 모든 것을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