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연애시대' 감상문 대신 에세이
*사진: Unsplash
퇴근길이다.
겨울 하늘은 종일 건조한 회색을 품고 있었고,
정오의 태양조차 존재감을 잃은채 희미하게 걸려 있다.
길은 막히지 않을 이유가 충분했지만
이상하게도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틀어둔 영상의 목소리는 들렸다 말다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완전히 꺼진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정적은 바로 환영의 시작을 의미했다.
처음 등장한 것은 입술이다.
말라 터진 종이처럼 갈라져서
피가 반쯤 굳어 껍질처럼 들떠 있다.
교통사고 직후의 얼굴 같았다.
턱은 형체를 잃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살점이 겨우 붙어 있는 느낌.
'그래도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잘한다면 복원되긴 하겠네.'
그 생각이 스쳤다.
난 T는 아니지만, 환영의 순간만큼은 차갑게 선을 긋는다.
감정으로 다가가면 내가 다칠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해석할 때는 거리가 필요하다.
입에서 시선이 위로 이동했다.
이제 얼굴 전체가 보인다.
중성적인 이목구비,
흐릿하게 시작해서 점점 또렷해진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연상시키는 가볍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
미간이 구겨지더니
마치 오래된 고통이 다시 찾아온 사람처럼
얼굴 전체가 고통의 방향으로 일그러진다.
그리고
사라졌다.
찰나였다.
나는 그 얼굴을 모른다.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누구의 심리적 조각인지는 너무 쉽게 짐작이 되었다.
말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떨어져 나온 상징의 파편.
그리고는 이내 잊어버렸다.
환영은 평소에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꿈과 비슷하다.
다시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그건 뭐였을까 하고 떠올리게 되는 정도이다.
드라마 '연애시대'가 떠올랐다.
왜 그 둘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의 상처를 키워갔을까?
말 한마디면 서로를 꺼내올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침묵을 택했을까?
그러나 그 답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환영을 보고 나서야
작은 답 같은 것이 떠올랐다.
너무 아픈 상처는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같은 파열음을 수천 번 재생시키고
그럼에도 다시 또 반복한다.
어째서 같은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반복해야했을까?
그러나
막상 그 시작은,
입을 열어 첫 문장을 말하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 둘에게는,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쩌면 이런 말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말해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당신이 말하지 못한 것들을
조용히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쓸데없이 상처를 헤집지 않고
설령 침묵 속에서라도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도록.
어쩌면
아무 말도 없이 조금 더 깊어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