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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위생으로서의 독서

읽는다는 것은 마음을 정돈하는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독서는 흔히 지식 습득이나 취미로 분류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독서는 언제나 정신 위생(hygiene of the mind)의 기능을 수행해 왔다. 이는 감정의 위안을 넘어, 사고의 과잉과 정서적 혼탁을 정리하는 인지적·정서적 정화 장치에 가깝다.

고대 그리스의 도서관 입구에는

“이곳은 영혼의 치유 장소”라는 문구가 새겨졌다고 전해진다.

독서가 단순한 정보 소비가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기술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1. 독서는 감정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 그래서 안전하다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D. W. Winnicott)은 인간이 회복되는 심리적 공간을 ‘중간 대상 영역(Transitional Space)’이라 불렀다. 이 영역은 현실과 환상의 중간 지점으로, 인간이 상처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도 감정을 다룰 수 있는 안전한 장소다.


독서는 바로 이 영역에 속한다.

책 속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방어를 자극하지 않지만, 동시에 ‘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의 공명을 일으킨다. 이 간접성 덕분에 독자는 자기 감정을 위협 없이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독서는 위로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정리할 시간을 허용한다.


2. 독서는 사고의 과잉을 정렬한다

현대 심리학에서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사건 자체보다 반복적 사고(rumination)다. 인지행동치료(CBT) 계열의 연구들은 감정 불안정의 상당 부분이, 감정보다 통제되지 않은 사고의 반복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독서는 이 반복을 중단시킨다.

텍스트를 따라가는 동안 사고의 리듬은 저자의 문장 구조에 맞춰 재배열된다. 이는 일종의 인지적 외주화다. 내가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사고를 대신 끌고 간다.


이 점에서 독서는 명상과 닮았지만 동일하지 않다.

명상이 ‘비움’이라면, 독서는 정렬에 가깝다.


3. 서사는 혼란을 구조로 바꾼다

융 심리학에서 칼 융(C. G. Jung)은 인간이 혼란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를 ‘의미 없음’에서 찾았다. 사건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맥락 없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서사는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원인과 결과, 시간의 흐름, 인물의 위치를 제공함으로써 감정을 구조로 환원한다. 독자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해석하지 않아도,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형태를 빌려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설과 에세이, 신화적 구조를 가진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다룬다. 이는 회피가 아니라, 보다 안전한 접근 방식이다.


4. 전문직일수록 독서의 정신 위생 기능은 강화된다

연구자·법조인·의사·교수처럼 감정 억제와 판단을 요구받는 직업군일수록, 업무와 직접적으로 무관한 독서에 강하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어빈 얄롬(Irvin Yalom)은 치료자들이 문학을 읽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은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을 보여준다.”

규칙과 결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독서는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

감정을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접촉을 제공한다.


이는 취미가 아니라, 무의식적 자기 조절 전략에 가깝다.


5. 정신 위생으로서의 독서는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정신 위생의 목적은 문제 해결이 아니다.

문제가 문제로 작동하지 않게 만드는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독서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독자는 책을 덮은 뒤 이렇게 느낀다.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압도되지 않는 상태

이 미묘한 차이가 정신 위생의 핵심이다.


결론

독서는 감정을 직접 만지지 않고도,

사고를 억지로 멈추지 않고도,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도

인간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그래서 독서는 오래 살아남았다.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정교한

정신 위생의 기술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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