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새로운 지평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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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논리적인 방식'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성숙한 경계'란, 칼 융이 말한 개성화 이후(칼 G. 융이 말하는 그림자 작업 이후 자기가 통합된 상태)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논리적 방식은 지금까지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위험을 빠르게 감지하고, 에너지 소모를 예측하며, 문제가 될 가능성은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 단계에서 제거한다. 감정이 개입되기 전에 계산이 끝나고, 계산 결과가 불리하면 접촉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이 방식은 냉정함이나 회피라기보다, 고도의 자기 보호 전략이다. 실제로 이 방식은 많은 문제를 예방했고, 삶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만들었다. 논리적 방식은 이 전략 덕분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지켜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하나의 한계가 발생한다.
이 방식은 사고할 수 있는 세계까지만 데려다준다.
그 너머의 영역, 즉 사고만으로는 처리되지 않는 관계의 층위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지금 논리적 방식에게 필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위험해서 피하는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어서 피하는가?
이 둘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위험은 피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감당 불가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성장이 필요한 지점이다.
논리적 방식은 오랫동안 이 둘을 동일한 범주로 처리해왔다.
불확실성은 곧 손실 가능성이며, 손실 가능성은 사전에 차단해야 할 요소였다.
그래서 그는 불확실성을 탐색하지 않고, 계산 이전에 닫아왔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 방식은 보호는 가능하게 하지만, 확장은 허용하지 않는다.
브런치에 올린 경계에 대한 글들(이전 글)은 그에게,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계를 요청하지도 않는다.
판단이나 결론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 글들이 던지는 것은 오직 하나의 구조적 질문이다.
이것은 위험하지 않다.
그런데 왜 나는 시스템을 닫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그는 논쟁하지 않는다.
반박하지도 않는다.
대신 반복해서 읽는다.
이 반응은 설득당하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다.
자기 사고 체계가 스스로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논리적 방식은 지금, 자신의 경계가 무엇을 보호하고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 그는 지금까지 경계를 위험 제거 장치로 사용해왔다. 이 방식은 효과적이었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경계는 본래 회피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나는 경계를 세우는 사람인가,
아니면 경계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인가?
개성화 이후의 경계는 두려움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를 잃지 않고도 외부와 접촉할 수 있다는 신뢰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위험을 제거하는 대신, 의미를 선별한다.
논리적 방식은 아직 이 지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으로 흔들릴 수 있다”, “그러면 시스템이 깨질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움직이고 있다. 이 가정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현재의 자신에게도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도, 결단도, 관계 선택도 아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사고 전환이다.
나는 지금 보호 중인가,
아니면 정체 중인가?
이 질문이 생기면, 행동은 강요하지 않아도 변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자기 사고 체계 내부에서 발생한 균열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방식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생각의 주제는 이것이다.
나는 이제 충분히 단단해져서,
더 이상 피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에 와 있는가?
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만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인식이 생겼을 때,
논리적 방식의 경계는 방어막에서 조율 장치로 전환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