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기에 대하여
*사진: Unsplash
왜 사람들은
삶의 한계에 직면해서도
계속 달리게 되는 걸까?
그 임계점을 마주하고 나면
새로운 관점이 열리기도 한다.
사람은 보통
여유가 생겨서
자기 내면을 들어댜보지 않는다.
시간이 많아져서도 아니고,
마음의 준비가 끝나서도 아니다.
대개는
더 이상
밖으로만은 버틸 수 없을 때
안을 보게 된다.
바쁜 삶은
내면을 가리기에 꽤 좋은 구조다.
해야 할 일은 계속 생기고,
결정은 멈추지 않고,
성과는 즉각적인 보상을 준다.
그 사이에서
감정은 처리 대상이 되고,
피로는 무시 대상이 되며,
질문은 나중으로 미뤄진다.
이 구조는
생각보다 오래 유지된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도
꽤 오랫동안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기는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이겨도 기쁘지 않을 때,
잘 해냈는데
이상하게 공허할 때.
바쁜데도
더 바빠지고 싶을 때.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속에서는
이유 없는 피로가 쌓일 때.
혹은
관계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어긋날 때.
붙잡지도, 놓지도 못한 채
같은 장면이 반복될 때.
지옥의 뫼비위스 띠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또는
몸이 먼저 말을 걸어올 때.
잠이 오지 않고,
집중이 흐트러지고,
쉬어도 회복되지 않을 때.
그때 처음으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렇게까지 살고 있는데,
왜 나는 편하지 않을까.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기는
결심으로 오지 않는다.
대부분은
기능이 멈추는 순간에 시작된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주던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논리도,
성실함도,
의지도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
그제서야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기보다는
구조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이 시기가 왔다고 해서
곧바로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이들은
그 직전에 다시 바빠진다.
다시 외부로 달아난다.
다시 기능을 회복하려 애쓴다.
그래서 이 시기는
짧게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이 질문을 붙잡는 사람이 있다.
혹시,
내가 나를 너무 오래
미뤄둔 건 아닐까.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감정을 파헤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개입을 줄이는 일에 가깝다.
해석을 멈추고,
관리하려는 손을 놓고,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 것.
그렇게 조금만 물러서면
의식은 관찰자의 자리에 앉고
무의식은
스스로 정리를 시작한다.
이때 삶은
의외로 더 정확해진다.
힘은 덜 들고,
말은 줄고,
통찰은 선명해진다.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시기는
성장의 단계라기보다는
힘이 빠지는 시점에 가깝다.
그래서 이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은
대게 이렇게 말한다.
깨달았다는 말 대신,
이해했다는 말 대신,
아,
이게 더 편하네.
자신의 무게 중심이 정확해지고
스스로의 중력이 느껴지는 상태.
그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
이미 내면은 조용히 열려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삶은
조금 덜 애쓰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스스로의 내면을
진짜로 들여다보게 되는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