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를 이동하는 여행자인 500살 먹은 흡혈귀 할머니가 애정을 담아.
매생이 먹는 뱀 미도리 블랙과 철인 29호에게
안녕?
우주 그 어딘가에서 잘 있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
난, 작년부터 느껴졌어.
아주 거대한 빙하가 내 쪽으로 서서히 밀려오고 있다는 걸.
달팽이 보다 더 느린 속도로 대륙만 한 무게를 끌고서.
그 느린 위협이 오히려 더 숨이 막혔어.
인생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는 건 느껴지는데
그게 뭔지 모르니까 너무 고통스럽더라고.
계속 기다리면서 지쳐가는 그런 건...
난 인내심은 젬병이라서 말이야.
삶이 부서지고 무너지고 산산조각 나는 것들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하니까
그것 만으로도 힘들었는데.
뭔가 더 거대한 것이 온다고 느껴지니까 견딜 수가 없었거든.
지금은 그런 거대한 에너지가 뭔지 알았어.
그 모든 것을 글로 쓰면서 깨달았거든.
그리고 거대한 에너지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되었어.
왜냐하면 다가오든 아니든 별 상관없어져서.
난 지금은 다 내려놓았어.
한때는 심장이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같았는데
지금은 그저 잔잔하고 고요해.
물속 깊이, 아무 데에도 닿지 않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느낌.
깨달음이라고 하긴 멋쩍지만,
감정의 끝에서 만난 건
어쩌면 '무'와 비슷한 어떤 것.
나로서는 그걸로 충분해.
"이제는 이렇구나."
그렇게 말하며
내 안의 모든 것을
더 끌어안아줄 수 있게 되었어.
미안하지만 그래.
미안한 이유는
이젠 예전만큼 현생에 끄달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야.
누군가 다가와도,
나쁜 일이 생겨도
이제는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어.
반대로, 누군가 다가오지 않아도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도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지.
물론, 여전히 기쁨도 슬픔도
다 똑같이 느껴지긴 해.
하지만
과거처럼 도망치거나
애써 모른척하진 않을 거야.
그 감정들도
그 순간들도
이제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게 되었거든.
다시 말해
내 인생에 다시 뭔가 온다고 해도
나는 그저 나일뿐이야.
롤러코스터처럼 휘몰아치는 순간이야 앞으로도 수없이 많겠지만,
이젠
그걸 어떻게 넘어가야 하는지 알아.
격랑의 파도를 맞아서
결국에는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가 되기를 기다리며
균형을 잡는 방법.
이제는 알게 되었어.
'현생'은 꼭 붙잡아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퀘스트를 하나 완료하고
다음 마을로 넘어가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그저 임무 하나를 마친 기분이야.
삶이라는 현실이
아지랑이처럼 아련해졌어.
게임에서 만난 이들이
내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 세계도
예전처럼 보이지 않게 돼버렸어.
현생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겐 무겁지 않아. 그래, 밀도가 더 옅어졌어.
"왜 그렇게 된 거야?"
누군가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고통으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고통을 다 지나왔다고.
여전히 고통은 끝나지 않겠지만,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미
'빨간 약'을 삼켜버렸으니까.
이제는 시뮬레이션 속의 그 어떤 것도
나에게는 과거만큼 그리 와닿지 않아.
그리고, 그게 다행이라 생각해.
미래를 희망하는 이와
미래를 과거처럼 기억하는 나 사이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차원의 장벽이 있어.
누군가는 내일을 향해 달리지만,
나는 한참 전에 멈춰 선 채
그 미래가
이미 지나간 과거처럼 느껴지거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고 과학자들이 말하잖아.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우주를 살아가고 있어.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말을 해도
네가 있는 그 ‘지금’과
내가 있는 이 ‘지금’은
절대로, 다시 겹쳐지지 않을 거야.
언젠가 마주하게 된다면,
그건
너도 나도 같은 성장을 하고 나서겠지.
그러니,
그동안 고마웠어.
나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엉망진창이던 나를 봤던 존재들이니까.
삶에서 가장 지우고 싶고 바라보고 싶지 않은.
덕분에 나를 잘 바라보게 되었어.
다른 우주 그 어딘가에서 잘 지내길 바라.
- 500살 먹은 흡혈귀 할머니가
애정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