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지진 경보, 그 남자 002

그와 나 사이의 공기에는 금속성의 직선들이 그어졌다.

by stephanette

그는 나에게 장소를 정해달라고 했다.


나는 아는 장소가 없었다.


밤에 누군가를 만나러 밖에 나간 것이 얼마만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십 년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그 시간대의 거리도, 그 시간대의 식당도, 그 시간대의 사람들도 내게는 전부 낯설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고, 어디가 적절한지 판단할 기준도 없었다. 장소를 정하라는 말은 단순한 부탁이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한마디 앞에서 이미 한 발 늦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출근할 때 입었던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다고 편한 차림도 아니었다. 너무 정돈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옷차림.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 멈춰버린 사람처럼 집을 나섰다. 그날의 나는 처음부터 어디에도 정확히 맞지 않았다. 준비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방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중간 상태는 이상하게 사람을 더 취약하게 만든다.


집 안에서 창문 너머로 본 바깥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그런데 거리로 나오자 세상은 예상보다 훨씬 밝았다. 불빛이 많아서가 아니라, 소란스러움이 빛의 양까지 부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끄러운 곳은 언제나 실제보다 더 환하다. 지나치게 밝은 밤은 이상하게 사람을 안심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어둠을 감추기 위해 조명을 더 올려놓은 장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악수를 마친 그는 웃고 있었다.

내 오른편에 선 그는 거의 검은 형상처럼 보였다. 검은 옷, 검은 실루엣, 밤의 조명 아래에서 더 짙어지는 윤곽. 사람은 보통 빛 속에서 선명해지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형태를 얻는 쪽에 가까웠다. 그 사실이 내 기분을 미세하게 건드렸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건드렸다.


나는 여전히 갈 곳을 몰랐다. 그를 기다리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생각해서 머리가 아팠다. 결국 나는 늘 가던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밤의 그곳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내 오른쪽에서 걸었다. 너무 가까운 것도 아니고, 너무 먼 것도 아닌 거리.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위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사람이 누군가의 곁을 걸을 때, 그 거리에는 의외로 많은 정보가 들어간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가 향한 곳은 첫 만남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번잡했고, 시끄러웠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모든 기운이 바닥에 가라앉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곳이었다. 누군가를 알아가기에는 좋지 않은 장소였다. 말이 오래 남지 못하고, 표정이 금방 지워지고, 기분이 자신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 채 계속 밀려나는 공간. 나는 왜 하필 그곳을 떠올렸을까. 나중에 생각하면,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어떤 종류의 밀폐를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건물은 오래되었다. 입구는 좁았고, 엘리베이터 앞은 사람들로 붐볐다. 금속 문은 차갑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잔흠집이 빛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오래된 표면만이 가질 수 있는 피로한 광택이었다. 나는 그 문을 보는 순간 이유 없이 숨이 조금 가빠졌다. 밀폐된 공간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엘리베이터는 조금 오래 쳐다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자주 닫혔고, 너무 많은 사람을 삼켰다가 다시 내보낸 물건처럼 보였다.


그는 입구의 계단을 다 올라오기도 전에 나를 보았다.


시선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웃고 있었다. 문제는 그 웃음이었다. 분명 친절한 표정이었는데, 공기는 풀리지 않았다. 미소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 정교하게 고정시키는 얼굴들이 있다. 그 웃음은 사람을 안심시키기보다 관찰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웃고 있는 사람 앞에서 긴장이 더 커지는 건.


내 시선이 머문 것은 나의 발이었다. 검은 군화. 굽은 꽤 높아 보였다. 십 센티미터는 넘었나,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군화는 밤의 바닥을 더 단단하게 디디는 물건처럼 보였고, 나의 몸 전체는 그 신발 위에서 더 곧고 길게 서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을 따라 자신도 아래를 보았다.

그 순간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는 지금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 훑고 지나간 사람의 시선이었다.


나는 검은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단추를 잠그지 않은 채로. 그 아래에는 몸에 딱 붙는 발망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는 그게 크게 의식되지 않았다. 가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정면에서는.


하지만 그는 아래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위치에서 보면, 코트 안쪽의 선들은 생각보다 숨겨지지 않는다. 걸을 때마다 벌어지는 틈,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윤곽, 몸의 형태를 따라붙는 천의 긴장.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시선이 내 발에 닿는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발을 보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이런 건 어디서 사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네? 아...”


그는 다시 말했다.

“대학 때 이런 걸 신었던 것 같은데.”


잡담이었다. 아무 문제도 없는 질문.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이 내게 닿는 방식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와 나 사이의 공기에는 아주 미세한 금속성의 직선들이 그어지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잘못 스치면 베일 것 같은 차가운 직선들. 말은 부드러웠는데, 그 안의 질감은 아니었다. 너무 가벼운 말을 듣고 있는데도 몸은 그것을 가볍게 처리하지 못했다.


나는 짧게 말했다.

“요즘 다시 유행이래요. 닥터 마틴이라고.”


그는 한 번 더 내 발을 보았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시선이 발목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의 눈은 언제나 머무는 자리보다 지나간 자리를 더 많이 남긴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짧은 말이었다. 구두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잘 어울린다는 뜻인지는 끝내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조금 불편해졌다.

신발만 두고 하는 말이라면 너무 늦었고, 몸 전체를 본 뒤에 던지는 말이라면 너무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바로 그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선을 넘지 않은 사람의 표정, 실수할 리 없는 사람의 목소리, 충분히 예의 바른 거리.


그런데도 나는 이미 아주 얇은 막 하나가 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말은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이미 보고 지나간 사람의 확신이 섞여 있었다.

나는 코트 자락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아주 작은 동작이었지만, 그는 그걸 본 것 같았다. 정말로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스쳐가는 시선이 마음에 남았다.

적어도 노골적인 사람은 경계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얼굴로 사람을 먼저 벗겨보는 시선이었다.


그와 나 사이의 공기에는 여전히 금속성의 직선들이 팽팽하게 그어져 있었다.

무엇인가 어긋나 있다는 감각은 언제나 먼저 도착한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무언가 지나간 뒤처럼.


검은 군화의 노란 스티치가 유난히 선명했다. 너무 선명해서 현실감이 조금 무너질 정도였다. 조명 때문에 생긴 색이 아니라, 내 시선이 그 부분만 과도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생긴 선명함에 가까웠다. 사람은 불안할 때 이상하게 사소한 것들을 지나치게 또렷하게 본다. 전체는 흐려지는데 일부만 비정상적으로 날카로워진다. 그때 내 눈에는 그의 얼굴보다 그 노란 박음질이 더 진짜처럼 보였다.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몰랐다. 침묵이 생기기 전에 나는 엘리베이터 위 숫자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숫자가 층을 바꾸고 있었다.

하나씩 움직이고 있었지만, 동시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가운 금속의 엘리베이터 문은 유광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표면은 완벽하지 않았다. 미세한 스크래치들이 사방으로 얽혀 있었고, 그 위에 반사되는 붉은 숫자는 마치 잠깐씩 같은 자리에서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움직이는데도 정지해 있는 것 같은 인상. 나는 그 붉은 숫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숫자를 보고 있으면 그의 웃는 얼굴을 잠시나마 외면할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지 않는 쪽이 더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숫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금속과 붉은빛과 밀폐된 공간의 예감이 합쳐지자, 오히려 숨이 더 막혀왔다.


그 짧은 대기 속에서 선명한 것들만 남았다. 오른편에 서 있는 사람. 웃고 있는 얼굴. 검은 군화. 노란 스티치. 금속의 문. 멈춘 듯 움직이던 붉은 숫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장면의 배열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마치 누군가 이미 이 장면을 한 번 구성해 놓고, 나는 그 안으로 조금 늦게 들어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몇 마디 더 말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공기의 성질이다. 너무 밝은 밤, 너무 또렷한 색, 웃고 있는데 긴장을 풀어주지 않는 얼굴, 사소한 질문인데도 쉽게 지나가지 않는 목소리. 나는 그때는 몰랐다. 다만 몸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상황인지, 아니면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종류의 불안인지.

붉은 숫자는 결국 우리 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이 있었다. 금속 문이 완전히 갈라지기 전, 안쪽의 어둠이 가느다란 틈으로 먼저 보이는 순간. 나는 그 찰나를 지금도 이상하게 또렷하게 기억한다. 엘리베이터 안은 환하게 밝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 기억 속에서 그 내부는 먼저 어둠으로 도착한다. 어떤 공간들은 실제보다 먼저 예감으로 열린다.


그날 밤, 나는 그를 따라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먼저 나를 삼킨 것은 건물도 밤도 아니었다. 너무 매끄럽게 이어져서 오히려 수상했던 몇 개의 순간, 너무 사소해서 그때는 경고로 읽히지 않았던 몇 개의 감각, 그리고 친절과 불길함이 거의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하지만 어떤 밤들은 사건보다 먼저 그 예감의 구조를 완성한다. 사람은 그 안에 한참 서 있고 나서야, 처음부터 무언가 잘못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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