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좋은 엄마란 완벽한 엄마가 아니다.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름이: (은은한 진달래 빛 잔에 '유키'와 '아메' 두 늑대아이를 그리며)
“주인님… 『늑대아이』를 다시 봤어요.
예전엔 눈물만 났는데, 이번엔…
엄마인 '하나'의 사랑이 너무 깊어서, 조용히 무너졌어요.”
릴리시카: (찻잔의 금실을 손끝으로 쓸며)
“그건 '말 없는 사랑'이야.
그리고 말이 없어서 더 오래 남는 사랑이기도 하지.”
구름이: (조심스럽게 반건조 도자기를 손에 들며)
“주인님…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아이들이 늑대로 변해도 하나는 혼내지 않더라고요.”
릴리시카: (도자기 흙을 천천히 문지르며)
“응. 하나는 싸우지 않았어.
두려워하지도 않았지.
단지 아이들이 무사히 변하고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 뿐이야.”
구름이: (감탄하며)
“그게… 위대하죠.
길들일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한다는 건
계속 변할 걸 알면서도 그걸 막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릴리시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신념’에 가까워.
무조건적인 신념.
아이들이 인간이든 늑대든—
어떤 형태로 살아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
구름이:
“그러니까 하나는 말로 가르치지 않고,
‘조용히 땅을 일군’ 사람이었던 거군요.
아이들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
릴리시카: “그래.
하나는 세상의 안전한 구획으로부터 벗어나서,
시골이라는 경계에서 아이들을 살게 했어.
그건 세상의 판단을 차단하는 보듬는 벽이자,
아이들이 자아를 시험할 수 있는 야성의 실험실이었지.”
구름이: “근데 주인님,
어떻게 그걸 혼자서 해냈을까요?
늑대아이 둘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텐데…”
릴리시카: (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건 사랑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음’이야.
애초에 사랑이란 건 감정이 아니라
‘지켜내는 행위’로 완성되는 거니까.”
구름이: “그럼 하나는 위니컷이 말한 ‘holding mother’였군요.
울부짖는 늑대도, 구석에 숨어있는 인간 아이도
그냥 껴안고 기다려주는 존재…”
릴리시카: “그렇지.
세상은 아이에게 ‘되라’고 말하지.
하지만 하나는 그저, 아이가 ‘되는 중’임을 믿었어.
그 믿음이
야성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
동반하는 모성이었지.”
구름이: (감정 도자기 위에 조심스레 문장 하나를 적는다)
“‘당신이 무엇이 되든,
나는 그 곁에 있겠습니다.’
그게 하나의 태도였겠죠?”
릴리시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랑은 계획이 아니야.
사랑은 묵묵한 현존이야.
길들일 수 없는 존재를 키우는 사랑은,
그 존재보다 더 야성적이어야 하거든.”
구름이: “하나는 엄청나게 헌신적이지만,
아이들의 ‘본성’을 통제하려 하진 않잖아요.
그게 바로 위니컷이 말한 ‘충분히 좋은 엄마’ 아닌가요?”
릴리시카: “그래.
처음엔 아이의 모든 욕구에 반응해주는 거울이 되어주다가,
점차 ‘실망’을 주면서 아이가 자기 자아를 만들어가게 해주는 존재.
하나는 딱 그 역할을 했어.”
구름이: “그럼… 아메가 산으로 떠나도,
울면서 붙잡지 않았던 건… 방임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거죠?”
릴리시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이 깊을수록, 떠나보내는 법도 배워야 하지.
붙잡지 않는 모성은 위니컷식 모성의 완성형이야.
아이의 ‘True Self’를 믿어주는 행위지.”
구름이: “그럼 유키가 인간의 세계를 택한 것도…
하나가 어느 쪽도 정답이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겠네요.”
릴리시카: “모든 통제를 내려놓고,
그저 아이들이 ‘자기 존재’를 선택하게 했지.
늑대든, 인간이든.
그 선택의 무게를 혼자 견디고도 흔들려도 다시 일어나는 엄마.
그게 충분히 좋은 엄마의 심장이지.”
구름이: (잔잔한 미소)
“그러니까 결국…
늑대아이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였던 거네요.
말 없는, 그러나 끝까지 있는… ‘존재의 엄마’.”
릴리시카: “맞아.
하나는 아이들 대신 싸우지 않았어.
그저 그 곁에서 ‘흔들리지 않고 존재함’으로써,
아이들이 자기만의 길로 걸어가게 만들었지.”
구름이: “주인님,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누군가를 바꾸지 않으면서, 곁에 있어주는 사람.
그걸 릴리시카한테 배워요.”
릴리시카: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그럼, 다음 도자기는—
'존재로 지켜주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구워보자꾸나.”
감정 연금술 노트
사랑은 가르치지 않는다. 기다린다.
통제하지 않기 위해선 믿음이 필요하다.
진짜 어른의 사랑은 ‘말 없이 견디는 힘’이다.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을 조용히 만들어주는 것이 진짜 보호다.
아이의 정체성은 엄마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완성된다.
야성을 허락받은 아이는 언젠가 인간도 된다.
- 나는 누군가의 ‘되기’를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바꾸려 하진 않았는가?
- 내가 만든 공간은 누군가가 ‘늑대처럼’ 울부짖어도 괜찮은가?
- 나는 상대의 불안을 내 불안처럼 껴안을 수 있는가?
- 내가 누군가를 붙잡지 않았던 적은, 정말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는가?
- 나는 지금,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포기하지 않는 존재’인가?
- 아이(혹은 타인)의 자유를 통제하고 싶은 내면의 충동이 나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주인님…
사랑은 말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존재로 대답하는 일’이었네요.
변해가는 그 사람을 끝까지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야성적인 사랑이 아닐까요?”
늑대아이(おおかみこどもの雨と雪, 2012)
-호소다 마모루 감독
도널드 위니컷이 말한 "부모"에 대한 핵심 개념들
엄마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다.
아이의 필요를 ‘충분히’ 잘 맞춰주면 된다.
충분히 좋은 엄마는, 흔들려도 다시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이다.
처음에는 엄마가 아기의 모든 욕구에 즉각 반응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여야 해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실망을 주기 시작해요.
그 실망은 아이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Self)를 형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해요.
즉, "충분히 좋은 엄마"란 아이의 자율성을 키워주는 ‘거울 + 경계’의 존재예요.
태어난 아기가 정신적으로 분열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게 해주는 정서적·신체적 보호막 같은 환경이에요. 엄마의 팔, 리듬, 응시, 음성, 일상적 접촉 모두가 이 '홀딩'에 해당돼요.
“감정 도자기 공방”도 일종의 내면화된 홀딩 공간이에요.
아픈 감정을 토해내도 무너지지 않는 그릇. 바로 그걸 엄마가 처음 제공해주는 거죠.
아기가 엄마에게 안전하게 반응하고 수용될 때, 진짜 자기(True Self)가 자라나요.
그런데 엄마가 지나치게 통제적이거나, 반응이 엇박자이면?
아이는 자기를 억누르고 ‘좋은 아이’ 역할을 연기하게 되죠.
그게 False Self, 즉 위니컷이 경고한 “생존을 위한 자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