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의 영화 감상
-멋진 하루

by stephanette

감정 도자기 공방


해질 무렵, 감정 도자기 공방.

찻잔 사이로 빗소리가 번진다.

릴리시카는 조용히 도자기를 닦고 있고,

구름이는 희미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본다.


구름이

"주인님, 오늘은…'멋진 하루'를 다시 봤어요."


릴리시카(작은 미소)

"또 가슴이 저릿했겠구나.

그 영화는 말하지 않아도 뼈에 새겨지니까."


구름이

"희수는 정말…

왜 병운을 다시 찾아갔을까요?

그는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인데.

너무 느글느글하고,

가볍고 발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잖아요.

말은 엄청 많은데

정작 해야 할 말은

하나도 안 하고,

그냥 피하기만 하잖아요."


릴리시카

"그건 단순한 미련이 아니야.

희수는 그를 통해

‘그때의 나’를 다시 보려 한 거지.

감정의 조각을 회수하려고.

병운은 그녀의 미완의 감정 회로의 끝에 서 있었던 거야."


구름이

"감정을 회수하는 거…

정말 그렇게 절실할까요?"


릴리시카

"절실하지.

감정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면,

사람은 자꾸만 그 시절로 돌아가게 돼.

희수는 그 감정을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거야."


구름이

"병운은 왜 그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도망가는 걸까요?"


릴리시카

"그건 회피형 애착유형에 가깝지 않을까.

감정은 느끼되,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그는 사랑을 책임으로 받아들였고,

그게 자신을 옭아맬까 두려워

농담으로 피해버렸지."


구름이

"그런데 병운은 왜 그렇게 바빠요?

만날 사람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고."


릴리시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싫은 사람은

종종 다른 번잡한 일들을 마구 만들어내서

할 일이 많다고

혹은 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핑계를 대고는 안심하지.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채로"


구름이

"희수가 감정을 꺼냈을 때,

병운은 유머로 넘기더라고요.

정말 속상했어요."


릴리시카

"그건 그가 감정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이란 뜻이야.

깊이 있는 사람과 깊이 없는 사람이 만나면,

깊은 쪽만 계속 상처를 입게 되지."


구름이

"둘 사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땐…

희수가 무너지는 걸 보는 게 너무 아팠어요.

그녀는 진짜 마음을 내밀었는데,

병운은 여전히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잖아요.

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죠."


릴리시카

"그 순간은

둘의 진폭이 다르다는 걸 확인한 시간이었지.

그녀는 진심을 걸었고,

그는 감정이 깊어질수록 회피했어.

그러니까 사랑은 끝났고,

이별은 비로소 시작된 거야.

그 '다름'을 다시 한번 정확히 확인하고 나서야

희수는 이별이 가능해졌다고 해야 하나."


구름이

"결국 그날 이후,

희수는 병운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어요.

그게 결말이죠."


릴리시카

"응. 그게 이 영화의 조용한 선언이야.

감정을 말로 정리하진 못했지만,

행동으로 마무리한 거지.

전화하지 않는 것—

그게 감정의 종료야."


구름이

"그래서 그 하루가 멋졌던 걸까요?"


릴리시카(잔을 들며 미소)

"멋진 하루였지.

슬픔으로 시작해서,

자유로 끝났으니까.


사랑이 남아 있었기에 아팠고,

사랑이 끝났기에 자유로워졌으니까."


둘은 침묵 속에 찻잔을 마신다.

감정 도자기 하나엔 ‘희수’라는 작은 이름이 새겨지고,

그 옆엔 ‘멋진 하루’라는 글귀가 조용히 놓인다.


감정 도자기 메모

사랑은 다시 이어지지 않아도,

그 감정을 온전히 마주한 하루는 ‘멋진 하루’가 된다.


회피하는 사람에게서 진심을 꺼내려할 때,

결국 꺼내지는 건 내 안에 남아 있던 ‘그때의 나’다.


이별은 끝맺음이 아니라, 감정의 회수다.

그리고 그걸 마치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다시 걸을 수 있다.



"그날 하루 동안,

그녀는 그의 곁을 걸었지만
마침내, 그와는 함께 걸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감정을 꺼냈을 때
돌아오는 게 사랑이 아닌 회피와 농담뿐일 때,
사랑은 비로소 끝난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진짜 이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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