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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이후의 성장, 내면의 통합

– 감정의 주인이 되기까지의 여정

by stephanette

“나는 이제 괜찮아졌어.”

그 말을 입 밖에 꺼내는 데까지

몇 년이 걸렸다.

하지만 '괜찮아졌다'는 건,

예전의 내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이전에는 몰랐던 나로 성장했다는 의미였다.


1. 상처 이후, 여정은 시작된다

트라우마는 단지 고통의 경험이 아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정체성의 분열이고,

내 안의 ‘감정’, ‘몸’, ‘의식’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상태다.

심리학자 Judith Herman은 이렇게 말한다


“외상은 기억되지 않는다. 재경험될 뿐이다.”


말하자면,

상처는 머리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감정과 몸의 흔들림으로 내 안에 남는다.

하지만 놀라운 건,

바로 그 상처의 자리에서

진짜 자아의 씨앗이 움튼다는 것이다.


2. 감정 조절 → 감정 표현 → 감정 주체성 회복

트라우마 이후의 회복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심리적 진화다.


1단계 – 감정 조절 (Regulation)

먼저, 압도적인 감정의 파도에서

내가 ‘숨 쉴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Janina Fisher는 이를 “감정과 동일시되지 않는 법”이라고 말한다.

“나는 분노를 느끼지만, 내가 곧 분노는 아니다.”

“나는 공포를 경험하지만, 그게 내 전부는 아니다.”

이 거리두기가 시작일 뿐이다.


2단계 – 감정 표현 (Expression)

그다음, 내 감정을 ‘몸 밖으로’ 내보내기.

말하고, 쓰고, 만들고, 그리는 모든 시도는

감정이 처음으로 이름을 얻는 순간이다.

감정은 말이 붙여질 때 현존하게 된다.

그 전까지는 막연한 파장에 불과했던 감정이

이름을 얻고, 의미를 가지며 나의 일부가 된다.


3단계 – 감정 주체로의 회복 (Ownership)

그리고 마지막.

내 감정이 ‘나를 덮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선택하는 것이 되는 지점.

감정이 나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흐름 안에서 나 자신을 ‘정제’해가는 것.


3. 통합, 그리고 자아의 확장

신경심리학자 Lisa Feldman Barrett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본능이 아니다. 감정은 구성된다.”


감정은 단순히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 문화, 기억,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건,

곧 나의 정체성 역시 재구성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트라우마 이후 성장, Post-Traumatic Growth의 핵심이다.

상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더 깊은 나로 통합되는 것.


4. 통합 이후의 나는

예전처럼 밝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정직하다.

더 깊고, 더 느리며, 더 단단하다.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글을 쓰고, 도자기를 굽고,

마침내 감정의 이름을 붙인다.


그건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삶을 다시 창조하는 일이다.



당신의 감정은,

한때는 너무 커서 삼킬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당신이 이름 붙일 수 있는 당신의 언어가 되었다.

이제, 그 감정이 당신의 세계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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